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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수 Jul 26. 2019

예민한 아기 첫 고비, 너무 운다

질문을 바꿔 볼게요.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예민하다는 단어를 쓸까요?

식당에서 나는 괜찮은데 면이 덜 익은 것 같다며 새로 해달라는 친구도 있고, 사방이 막힌 데다 조명이 강렬한 시끄러운 실내 쇼핑몰은 너무 피곤해서 오랜 시간을 같이 돌아볼 수 없는 친구도 있을 거예요. 우리는 이런 친구들에게 민감하다 혹은 예민하다는 꼬리표를 달아 줍니다.

  심리학계에서 말하는 민감함이란 바로 이 꼬리표들과 일맥상통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코·입·귀·피부·정서로는 걸러지지 않는 외부자극이 이들에게는 여지없이 걸려든다고나 할까요. 연구에 따르면 감각기관이 더 발달해서는 아니고, 감각 정보가 뇌로 가는 길이나 뇌 속 어딘가에서 정보를 좀 더 자세히 처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일레인 N. 아론,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 노혜숙 옮김, 웅진 지식하우스(2011), P41). 결과적으로는 결국 더 많이 보이고들리고맛이 나고냄새가 나고피부에 닿고생각이 많아진다는 겁니다. 감각적으로 더 많이 느껴지는 것이 뭐가 문제야? 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기가 예민하다면 문제가 조금 다릅니다. 다른 사람보다 예민한 만큼 요구가 많고, 요구가 많다는 것은 더 많이 운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것이 까다롭기도 하네, 울어도 달래주지 않으면 포기하겠지.’라고 간단히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불편함이나 요구를 울음으로만 표현하는 아기와 그 아기를 24시간 중 일 분 일 초도 떨어지지 않고 돌보아야 하는 엄마의 입장이라면 이것은 굉장히 큰 문제입니다. 먹고, 자고, 싸고, 노는 하루 24시간을 내내 예민하게 구는 아이의 특징을 모른다면 ‘육아를 하는 24시간 × 모든 날 = 고통’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포기할 때까지 울도록 두는 방식과 효과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인터넷에는 무용담처럼 “나는 아이가 울다 지쳐 잠들 때까지 두기를 몇 번 반복했더니 이제는 눕혀 놓으면 조금 울다가 잡니다.”라는 포스트를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육아 방식의 상징물은 ‘포대기’입니다. 아기를 한시도 엄마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등에 업고 포대기로 둘러서 키워왔는데요. 어느 때부터인가 서양식 아기침대에 아기를 혼자 두고 키우는 방식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육아방식의 이론을 정립한 사람은 벤저민 스포크라는 미국의 소아과 의사였습니다. 그는 부모가 아이를 계획된 일과에 따라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버릇없는 아이가 되어 부모를 조종할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만 수유를 하고, 운다고 해서 즉각 안아주지 말고, 잠은 따로 재우라는 지침을 세웠습니다. 이 이론은 전 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고 대략 50년 간 바른 육아의 정석처럼 여겨졌습니다. 지금도 이 조언을 믿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서양이 아닌 우리나라에서도 말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이겨 먹네”라고 하시는 어른들을 가끔 봅니다. 아기의 요구를 엄마가 그 때 그 때 반응해서 해결해주는 걸 아이가 부모를 조종하는 거라고 보는 시각입니다.

  1950년대로 접어 들어와 유아 행동에 대한 연구가 발전하면서 이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기 시작합니다. 최근에는, 아이가 처음으로 관계하는 엄마(아빠, 조부모님 등 다양하지만 엄마로 대표하겠습니다)와 정서적으로 깊은 유대를 가질수록 자존감이 높고 행복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다는 ‘애착육아’로까지 발전했습니다. 서양에서 아기 혼자 재우는 침대 대신 우리나라의 전통 포대기가 육아용품으로 유행하는 것도 이 흐름상의 일입니다. 

  아기의 울음을 무시하면 포기하는 순간이 오기는 합니다. 아기가 포기하기까지 내면에서 벌어진 일이 정확하게 향후 심리적으로 어떤 심리적인 문제를 만들었다는 단순 비교식 추적은 불가합니다. 하지만 연구결과에 따르면, 울음에 신속히 응답해준 아기들이 그렇지 못한 아기들보다 훗날 요구사항이 있을 때 울음보다는 더 나은 방식으로 의사표현을 했다는 겁니다. 울 때마다 아기를 안아주면 스스로 편안해지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요구만 늘 것이라는 주장이 그릇됐음을 보여주는 연구였습니다.

  우리가 아기라도 해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합니다. 불편함을 해결해 달라고 우는 건데,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일단 더 크게 울어볼 것입니다. 그러다 아무리 울어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경험이 계속되면, 결국은 내 쪽에서 먼저 포기하게 됩니다. 그 때 아기가 얻은 교훈은, ‘아무리 울어도 소용이 없구나! 저 사람은 내가 요구를 해도 들어주지 않겠구나!’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인지가 발달하지 않은 아기가 엄마의 바쁜 상황 전체를 이해할 리가 만무합니다. 이 절차를 밟고 덜 울게 됐거나, 요구하는 바가 적은 아이가 되었다면 마냥 ‘순한’ 아이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안타깝게도 보호자인 엄마를 향한 최초의 불신은 이후 타인으로까지 확대 됩니다. 그래서 생애 초기에 대인신뢰감을 획득하지 못한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과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고, 세상은 무서운 곳이며 살아가는 날은 무서운 세상을 견디는 일이라는 신념체계를 가지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욕구나 의사가 전달되지 않는 경험의 누적은, 자신은 대우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믿음으로 연결되기 쉽습니다. 즉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커지는 겁니다. 

  이와 같은 주장이 ‘애착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1950년대까지 유행한 벤저민 스포크의 주장에 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애착이론이 나오게 된 참혹한 역사적 시범 케이스를 알게 된다면, 아기가 따뜻한 엄마 품에서 일관적인 사랑을 받고 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런데 울게 두어도 괜찮은 아기들도 있습니다. 기질적으로 순한 아이들 중 일부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주변 자극에 대해서 크게 변별력을 가지지 않는 생리적 특성을 타고 났기 때문입니다. 순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불편한 자극이 이 아이들에게는 큰 불편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그 때 그 때 엄마가 반응해 주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낙담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다음번에 욕구를 해결해 주면 이전에 해결되지 않은 욕구로 인한 불편도 금세 잊습니다.

  예민하게 타고난 아기들은 정반대로 봐도 무방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서양식으로 침대에서 혼자 아기 재우기를 시도해 보았는데요. 제 아들은 신생아 때부터 사람 손에서 떨어지면 울었습니다. 작은 소리에도 놀라 깨고, 갑작스런 불빛이 들어와도 깨는 아기였는데요. 혼자 자게하려고 눕히는 순간부터 울기 시작했습니다. 15분이 지나니 울음소리가 더 커지고, 거기서 5분이 더 지나니 앙칼져지고 숨이 차오르기 시작하더니 입술이 파래졌습니다. 그렇게 두어 번을 더 시도해보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품에서 안아 재우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거기서 포기하지 말고 더 했어야 했다고 조언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7세가 되어 여러모로 일상에 평범하게 적응해가는 항목이 많아지는 아들을 보면, 그 때의 제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그게 제 육아취향이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많이 우는 아기 케이스가 있습니다. 엄마와 떨어지기만 하면 너무 많이 울어서 산후조리원 신생아실에서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제 아들은 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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