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은퇴, 그리고 새로운 시작

처음으로 맞이하는 백지의 시간

by 해일

만으로 15년,

나의 첫 번째 회사생활을 끝냈다.


공교롭게도 퇴사와 올해의 긴 추석 연휴가 겹쳐 실감이 안 났다. 출근을 안 해도 되는 건 나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양가를 방문드리기 전 2박 3일로 속초여행을 떠나는 길에 차가 막히자 나지막이 가벼운 불평을 해본다.

“퇴사하고 나면, 한 동안 사람 많은 곳은 안 다닐 줄 알았는데…”



하필 퇴사일자가 명절직전 일 줄은 몰랐기에 불평은 잠시 접어두고, 오랜만에 동해 바다를 즐겼다. 퇴사를 한 이후여서 그런지, 아니면 관광지라 그런지 몰라도 가는 곳곳마다 비싼 물가에 새삼 놀랐다. 평소 월급이 적은 편은 아니었기에 장을 보거나 외식할 때 가격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지금은 가격표의 숫자 하나하나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내가 이래저래 가격에 놀라며 비싸다는 말을 반복하자, 아내는 평소 듣던 소리가 아니었는지 물가가 많이 올랐는데 십수 년 전 얘기를 하시냐며 웃었다. 난 두고 보자며, 3달 뒤 퇴사하면 세상이 달라 보일 거라고 우격다짐해 본다.


짧은 2박 3일의 속초여행을 뒤로하고, 양 가에 방문하여 퇴사 소식을 전했다. 우리 부부는 전부터 계속 회사를 그만둘 것을 예고해서 그런지 놀라지는 않으셨지만, 이제 뭐 하고 살 거냐며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셨다. 하지만 우리에겐 무엇을 할 계획보다는 무엇을 하고 싶은 지를 찾는 게 우선이라며 조금은 철없는 얘기를 하고 웃어넘겼다. 우리 부부 둘 다 집안에서 크게 신경 안 써도 알아서 잘 기반을 잡았던 탓인지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고 넘어가시는 듯하다.



기나긴 추석 연휴가 지나고, 드디어 평일이다. 아내는 내년 1월 퇴직예정이라 출근의 불평을 나에게 한 움큼 쏟아내고 비 오는 출근길을 나섰다.

공휴일이 아닌 날에 나에게 주어진 백지의 시간

왜인지 모르게 바쁘게 움직여본다. 몸을 깨우기 위해 헬스장으로 향한 걸음으로 시작한 하루는 빨래와 책상정리와 같은 집안일로 이어졌다. 회사생활 때보다 늦은 점심을 챙겨 먹은 뒤엔 드럼과 골프연습으로 에너지를 소모하였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거실 소파에 앉아 여유를 즐기려 했지만 조금 있으면 아내가 퇴근하고 돌아오는 시간이다. 이상한 하루에 지친 나는 365일 떡볶이라면 오케이인 아내에게 저녁은 배달로 떡볶이를 먹자 제안했다. 저녁을 먹으며 오늘 하루에 대해 말해주고, 퇴사 후의 하루가 생각보다 여유롭지 못한 이유를 찾아보니 난 오늘 하루를 꼭 연차를 쓴 직장인처럼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한 두 달 쉬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그렇게 조급했을까. 어떤 시간이 그렇게 아까웠던 것일까. 나에게 남아 있는 직장인으로서의 진한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아서였을까. 멈춰도 괜찮은 백지의 시간 속에서도, 난 여전히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강박에 붙잡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