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 하나요?

happily ever after

by 아침이



동화 속 이야기의 끝은 대부분 “그래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난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어야 하는 동화라는 아름다운 미래가 영원하리란 엔딩이 잘 어울린다.


그렇다면 어른의 사정은 어떨까? 어른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른들을 위한 영화 역시 주인공이 주변인들과 함께 고난과 오해, 역경을 이겨내고 안정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보다는 조금은 더 구체화된 일상을 얻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


악당에게 배우자를 잃은 액션 영화의 주인공은 슬픔 이겨내고 배우자를 그리워하며 일상을 살아가고, 사업에 실패한 주인공은 여러 시행착오 끝에 돈보다 소즁한 가족의 사랑을 깨달으며 영화는 끝난다.


현실은 어떤가? 브런치에는 생각보다 많은 슬픔이 담겨 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 가족을 잃은 사람, 결혼이 깨진 사람, 우울에 빠져 있는 사람. 제각기 다른 사연들은 그만큼 다양한 모양으로 이곳에 기록되어 있다. 마치 강가에 조약돌을 다들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막상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다른 모양의 각기 다른 슬픔들은 이곳에 머물고 있다.


그 이어기들 속에서 어떤 사람은 슬픔과 상실을 극복했지만 어떤 사람은 여전히 우울과 절망 속에 머물러 있다. 누군가는 일상 속에 녹아있는 상실과 슬픔을 그럴싸한 포장 없이 느끼는 그대로를 기록한다. 사람들은 어째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슬픔을 펼쳐놓게 되는 걸까.





나는 눈물이 없다. 운다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달라지는 것도 없기에 잘 울지 않는다. 무엇보다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눈물을 흘린다면 운다면 지나온 세월의 80%는 눈물이었으리라.


나는 아빠의 죽음 앞에 오열하는 엄마를 두고서도 울지 않았고, 전화로 엄마의 부고를 전달받으면서도 울지 않았다.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는 것보단 참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10년 가까이 만나고 있는 상담 선생님조차 이런 곳에서라도 울면 좋겠단 말 할 정도로 울지 못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단단하게 막아 둔 슬픔인데 글을 쓸 때면 물이 새듯 아주 조금씩 감정들이 흘러나온다. 어쩌면 우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에 눈물 대신 이곳에 글로 마음을 쏟아내는 건 아닐까.



작년에 직장 동료 한분이 연로하신 아버님을 떠나보내셨다. 장례식장에서 남겨진 어머니가 걱정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아빠를 떠나보낸 이후가 어땠는지를 조심스레 나누었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아빠 책장이 치워진 걸 보고 충격받았던 경험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아빠만 없다는 사실이 일상 속에서 나에게 주던 크나큰 상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빠를 떠나보낸 지 꽤 시간이 흘렀기에 담담하게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야기의 끝에 우리 두 사람 모두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남겨질 어머니를 위한 도움을 주고픈 마음에 나누기 시작한 대화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다. 슬픔을 나누면 반절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슬픔은 또 다른 슬픔을 끌어안아 위로한다.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경험했기에 이해할 수 있는 마음들이 있다.


브런치의 한 구역은 조각나고 부서진 마음들을 가진 사람들의 영역이다. 그것들을 모아 엮어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는 곳이며 그곳이 내가 발을 내딘 곳인 것 같다.


모든 이야기의 끝이 그래서 어려움과 역경을 이겨내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날 필요는 없다. 상실과 슬픔을 이겨내지 못했더라고 우울에 잠식되어 있더라도 그건 그대로 우리에게 의미가 있으니 happily ever 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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