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쓸데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by 아침이




브런치에서 글을 쓰지 않는 동안 타 플랫폼에서 3만 자 정도의 글을 썼다. 그 글에 대한 결과가 어땠냐 하면, 그저 그랬다. 내 마음에 쏙 들었고, 잘 썼다고 생각했기에 좋은 반응을 기대했으나 반응은 그만큼이 아니어서 아쉽고 속상했다. 나를 달래기 위해 시작은 잘하지만 끝맺는 게 약한 내가 오랜만에 마무리 지은 긴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그렇게 브런치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글을 쓰면서 여실히 느낀 것은 내 감정이 너무 메말라 있다는 거였다. 메말라 있는 우물에서 무언가를 건져내려고 바닥을 긁다 보니 떠오르라는 영감은 간데없고 바닥을 긁어대는 손에서 피만 나오는 것만 같았다, 읽는 사람도 그렇게 느꼈던 걸까?


이상하게 고심하고 심혈을 기울여 쓴 글은 반응이 별로인데 가볍게 날리듯 쓴 글이 반응이 더 좋을 때가 있다. 쓰는 사람의 마음이 읽는 사람에게 닿기 때문일까?


한번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글을 쓰며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자꾸 완성되지 않은 글을 읽고 또 읽으며 검열을 하고 결국엔 마음에 차지 않는단 이유로 보이지 않는 창고 속에 처박아 두게 된다. 그렇게 빛을 보지 못한 아이디어와 글들이 버려지고 있다.


요 근래 브런치에 글을 3주 정도 못 올린 이유도 비슷하다. 다른 사람들은 아주 짧은 단상 같은 글들도 잘 올리는데 나는 왜 그게 쉽지 않을까. 때로는 논리구조가 빈약하더라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 내 대답은 ‘절대 아니요’


잘하고 싶다.

잘하다의 기준은 무엇인가? 글 하나에 백여 명의 사람들이 내 브런치를 구독해 주고 라이킷이 몇 백개 찍히는 것? 그것이 잘 쓴다의 기준이 되어 줄 수 있을까? 글쓰기에서 잘한다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을 수 있을까? 많은 대중들이 좋아하는 글?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은 글? 상업성이 뛰어난 글?


나는 한 때 유행처럼 서점가를 휩쓸었던 곰돌이 푸우 너는 죽더라도 떡볶이는 먹고 죽으렴 류와 같은 힐링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뭐 대단한 작가정신이 있어서는 아니고 지구온난화가 가속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스낵컬처처럼 가볍게 읽고 책장에서 영구히 보관될 책을 굳이 인쇄물로 찍어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가진 회의주의자라서 그렇다..


그런데 또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그럼 어떤 기준으로 인쇄될 책을 선별할 수 있느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냄비 받침으로나 쓰임을 다하고 있는 책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죽고 싶을 때마다 꺼내 읽으며 내일 하루만 더 살아보길 결심하는 책이 될 수 있는 건데.


그렇다면 나는 여태 영감의 우물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나는 벼락처럼 내려와 줄 영감님을 찾는 게 아니라 내면의 우물 바닥에 숨겨져 있는 날것의 원석들 사이에서 진짜로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감이 무엇인지, 내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기 무엇인지를 찾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글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기에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만들고 있는 걸까.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여태 연애했던 애인들도 하나같이 넌 생각이 너무 많다고 증언했고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들에 괴로워하며 잠 못 들었던 수많은 밤들 역시 그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끊임없이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고,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찾으며, 이 세상에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 내일도 모레도 이 회사에 다녀야 하는 이유를 계속해서 고민한다.


오늘의 내가 내일의 어떤 내가 될 것인지 고민은 좋은 게 아니냐고? 해답 없는 고민은 때론 그저 자신을 갉아먹기만 하는 법이다.


예전에 선생님에게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단 말을 한 적이 있다. 죽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냥 더 안 살아도 될 것 같다고 사람들은 이렇게 괴로운데 어떻게 안 죽고 살아가는지 모르겠다고 염세적인 말을 덤덤하게 했었다. 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아침씨는 중증 우울증 환자이고 우울삽화가 시작된 거 같으니 약을 증량합시다.’ 라고 말씀하시는 대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깊이 하지 않고 그냥 산다고 웃으며 이야기하셨다. 나는 그 이야기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그런 세상이 있다니! 나는 좀처럼 느껴지 보지 못한 감각이라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약을 바꾸고 치료를 계속하던 어느 날 처음으로 그 감각을 느꼈던 때가 있었다.

그날은 여느 때와 같은 그저 그런 날들 중에 하나였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이었고,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여름 날이었다. 버스에 앉아 창밖을 보는데 마음이 세상 평화로웠다. 내가 한동안 별생각 없이 단조롭게-,또 다른 표현으로는 평화롭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깨달았다. 바로 이 감각이구나! 그때의 전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꼭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 꼭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왜 꼭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자기 효능감, 자아존중감, 자기애 기타 등등이 부족하고 모자라 서겠지, 그리고 그게 부족한 인간이 된 이유는 적절한 칭찬과 관심과 인정을 받지 못했던 양육 환경 때문이겠고... 어쩌고저쩌고.


그런데 이렇게 내가 스스로에게 엄격해진 원인을 파헤친다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나를 아는 것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그것이 내 발목을 붙잡는 올무가 되기도 한다.


스스로를 향한 수많은 질문보단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하는 한 마디의 위로가 필요한 날이 있는 거다. 그렇기에 세상에 태어난 글 중에 쓸모없는 글은 없으며 글에는 높고 낮음이, 낫고 못남이 없는 것이다. 내가 쓴 글이 오늘의 누군가를 위로하고 내일을 기다려 볼 이유가 되어주었다면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했더라도, 글의 논리가 허술하고 문장이 투박하더라도 크게 상관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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