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그냥'의 힘

by 아침이






피겨의 여왕 김연아가 했던 인터뷰 중 내가 좋아하는 인터뷰가 하나 있다. 아주 예전 MBC 다큐 인터뷰에서 피디가 연습을 위해 루틴처럼 스트레칭을 하는 그녀에게 무슨 생각을 하면서 하냐며 질문했던 것이 그것인데 그때 김연아는 황당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긴 ‘그냥' 하는 거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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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Q0-MOh1nx44





그렇다. 때로는 거창한 이유 없이 그냥. 그냥 하는 힘이 필요한 때도 있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대단한 이유 없이 ‘그냥’ 하는 것이 힘을 가지고 있다.

이상하게도 대단하고 그럴싸한 이유를 찾으려 하면 해야 하는 이유보다 안 해도 되는 이유가 더 많이 튀어나온다. 그러니 때로는 그냥 머리를 비우고 ‘그냥’ 해야 한다.


나는 우울증 환자라 우울삽화가 심화되면 집을 치우지 않아도 되는 다섯 가지 정도의 이유를 찾아내, 집이 금방 쓰레기장이 되곤 한다.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일정기간을 쓰레기와 함께 산다는 의미다.)


쌓아놓은 설거지는 음식물은 냄새가 나지 않으면 필요해질 때까지 싱크대에서 방치되고, 묶어놓은 쓰레기는 벌레가 생기지 않으니 거실 한구석에 ‘보관’한다. 건조기를 돌린 옷은 딱히 개지 않아도 되니 영원히 건조기 안에서 방치되고, 거실 소파에 올려놓은 가방에서 나온 소지품들과 벗어놓은 옷은 치우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으니 영원히 그곳에 방치된다.


그것들을 치워야 하는 이유를 찾으라고 한다면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


다만 이러한 모습이 ‘정상’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는 자각 정도는 있다. 종종 집을 방치시키는 내 모습에 대해 게으름이라는 편리하고 단순한 이유를 붙이는 것이야말로 게으른 것 이기에 나 자신을 돌아보며 고찰을 했었다.


정말로 나는 도움이 필요한 환자가 맞기도 하지만 (우울증 증상이 호전되면 그럭저럭 때에 맞춰 집의 청결을 유지하며 지낸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죽고 싶은 때에도 제대로 씻고 회사는 잘 출근한다. 우울증이 모든 것의 원인은 아님이 분명했다. 집을 치우는 것은 왜 안 되는 것일까?


생각의 끝에 내가 이른 결론은 치운다는 것을 취사선택의 영역에 넣은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사실이었다.


집을 치우는 것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닌, 회사에 그냥 가는 것처럼 ‘그냥’ 하는 것으로 여기면 되는 거였는데, 사는 게 힘드니 약삭빠른 뇌는 청소를 취사선택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 내린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오늘 치우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로 영원히 내일을 또 내일로 미루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


그러니까 집을 치우는 것도, 친구에게 연락을 하는 것도, 나를 위해 스트레칭을 하는 것도, 전부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도 그냥. 해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냥’ 씻고, ‘그냥’ 회사에 가는 것처럼 ‘그냥’ 하는 것이 우울한 나를 현실에 붙잡아 주는 닻이 되어 주니까.


그렇다면 나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현실의 ‘닻’ 그냥 해야 하는 것은 또 무엇이 있을까? 문득, 글을 쓰는 것 역시 ‘그냥’의 영역에 넣어두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회사와 집을 반복하며 재미없는 인생 죽을까 말까 하던 나에게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재밌는 것이 바로 글을 쓰는 일이기에 그렇다. 다만 나는 꾸준함과는 거리가 좀 먼 사람이고 의외로 쉽게 흥미를 잃는다는 게 단점이다. 그러니 이런 나에게 ‘그냥’ 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내가 가진 재능은 많은데, 모두 어딘가 애매하고,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게 없다.


포토샵, 일러스트를 다룰 줄 알고(홍보용 인쇄물을 만들 정도는 되지만 화려한 디자인적 스킬을 보유하진 못했다) 영상 촬영과 편집도 할 줄 알고 (브이로그를 만들거나, 다른 사람의 영상을 짜깁기 해서 홍보 영상을 만들 정도는 되지만 화려한 모션을 만들지는 못한다.)


이 외에도 내가 가진 재능은 이런 식으로 그저 가지고 있을 뿐, 어디에 써먹을 수 있는 게 없다. 다른 사람들은 빛나는 구슬을 가지고 있어서 갈고닦은 구슬을 열심히 꿰어서 보배를 만드는데, 내가 가진 재능들은 조각난 퍼즐 조각 같아서 그것들만 한 움큼 들고 덩그러니 바보처럼 서있는 게 전부처럼 느껴진다.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우울증에서 비롯된 무기력 때문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적은 노력으로 적당히 그럴싸한 수준에까지는 쉽게 도달하는 사람이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수준에 도달한 것에 만족하고, 그 이후에 숙련된 실력이 되기 위해 견뎌야 하는 미성숙의 구간을 견디지 못하기에 금방 손을 떼버리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 밖에 되지 않는 나’를 내가 용납하지 못해서.


그러니 이제부터는 더더욱 ‘그냥’의 힘을 좀 믿어보려 한다. 안주하고 자책하기보다는 그냥 한걸음이라도 나아가는 사람이고 싶다. 시작한 것을 끝맺는 사람. 현재의 나 보다 아주 조금 높은 곳의 목표를 두고 앞서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한번 되어 보고 싶다. 오늘과는 다른 내일의 내가 되고 싶다. 나 스스로가 나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오늘도 ‘그냥’ 쓴다. 무언가 대단한 것이 되지 못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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