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회사에서 건강검진을 했다. 아주 놀라운 검사 결과를 받았는데 바로 1년 만에 무려 8kg이 쪘다는 사실이다. 나는 술도 안 마시고 폭식하는 편도 아닌데 대체 무엇이 이렇게 알차게 살찌운 걸까? 곰곰이 지난 일 년을 돌아보았다. 집과 회사를 오가는 일상을 쌓은 일 년 사이 바뀐 것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취미생활인 '케이팝'(이라고 쓰고 아이돌 쫓아다니기라고 읽으면 된다)을 그만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탕비실'이다. 이 두 가지가 정말로 8kg의 범인이라고? 그렇다니까!
우선은 케이팝부터 살펴보겠다. 케이팝은 의외로 활동량이 아주 많은 취미 생활이다. 국내 콘서트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하는 투어, 팬미팅, 팬사인회, 공개방송, 사전녹화, 해외 패션위크, 시상식 등등. 내 '최애'를 보기 위해서 참여할 수 있는 외부 활동은 상상 이상으로 많다. 컴백을 하면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팬사인회와 더불어 음악방송 촬영을 쫓아다니려면 몸이 세 개여도 모자라다.
일례로 월차를 쓰지 않고 해외투어를 다녀오기 위해선 때론 주말 새벽 2시 하네다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해 다시 새벽 첫차를 타고 출근하는 일정도 충분하게 소화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니 살이 찔 틈이 없지. 이런 과한 취미 활동을 그만두었으니 활동량이 대폭 줄어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제로 작년 이맘때쯤 일본에서 공연을 마치고 새벽 비행기를 타고 입국했던 티켓 내역이다.
두 번째로는 문제의 탕비실. 작년 탕비실의 퀄리티가 한차례 업그레이드 되었다. 내 입맛에 맞는 간식들이 꽉꽉 채워진 탕비실은 일주에 두세 번 찾을까 말까 했던 곳에서 참새가 방앗간 들리듯 매일 같이 찾아가는, 아주 매력적인 곳으로 탈바꿈했다. 출근 직후, 그리고 점심식사 후, 탕비실에 들러 주전부리를 챙겨 업무를 보는 것이 루틴으로 자리 잡기까진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 루틴! 이 루틴이 아주 무서운 녀석이다. 꾸준함의 힘은 결과가 긍정적인 아닌 것에도 착실하게 그 효과를 나타낸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던 조상님들의 지혜 어린 그 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니까.
그렇다면 매일 꾸준하게 글을 쓰다 보면 글쓰기 실력도 그렇게 늘 수 있는 걸까?
그렇게까지 꾸준하게 써본 적이 없어서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난 아직 초보 작가이고 글을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다. 인풋이 많냐고 물어본다면 꽤나 편식하는 편에 속한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다독, 다작, 다상량 중 자신 있게 꾸준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다상량뿐인데, 꾸준함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믿고 있다.
내 주변 가까이에서도 꾸준함에게 배신당하지 않은 친구들이 있다. 그것도 무려 세 명이나, 각기 다른 친구 3명이 코로나를 기점으로 각자 전혀 다른 일을 시작했었다. 한 명은 자기 집을 예쁘게 꾸며 인스타에 올렸고, 한 명은 본가의 작은 시골마을로 내려가 소소하게 인스타 감성의 꽃가게를 열었다. 마지막 한 명은 자신의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가죽공방을 열었다. 공통점은 세 사람 다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었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쉽게 접할 수 있는 수준의 라이선스 자격증을 따기 위한 최소한의 수업 정도를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곁에서 그 세 사람의 아마추어 시절을 지켜보았다. 5년이 흐른 지금 그들은 놀랍게도 그 분야에서 제법 전문가가 되었다. 인스타에서 꽤나 알아주는 인테리어 관련 인플루언서가 되었고, 꽃집 운영뿐만 아니라 꽃꽂이 강좌를 통해 외부 강연까지도 종종 나가고 있으며, 자신만의 디자인을 자랑하는 가죽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그 친구들은 시작부터 대단한 무언가가 되려고 계획하고 시작하지 않았다. 그저 코로나라는 환경의 변화 앞에 먹고살기 위한 새로운 밥벌이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래서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으며 관심 있는 분야를 선택해 조금씩 나아갔을 뿐이다. 가능한 만큼 걸음을 조금씩 꾸준하게 내디뎠고, 시간이 흐른 후에 지금의 자리에 가게 된 것이다. 이렇듯 누군가 이룬 대단해 보이는 일들은 어쩌면 평범한 날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평범한 날들은 무엇으로 채우고 있는가?
유튜브를 많이 보면, 그냥 유튜브를 많이 본 사람에 그치는 걸까? 웹소설을 많이 읽으면 그냥 웹소설을 많이 읽은 사람에 그치는 걸까? 비생산적인 일들은 정말 그것으로 끝일까?
나는 어릴 적부터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콘텐츠 중독자였다. 국어책을 받으면 새로운 이야기들을 가장 먼저 찾아 읽어보는 그런 어린이 었고, 독립영화관까지 쫓아다니며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길 즐겨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냥 책을 많이 읽고 영화를 많이 본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어딘가에서 별다른 글쓰기 기술을 배우지 않았지만 어렵지 않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어릴 때부터 꾸준하게 읽어 온 텍스트들과, 매일 같이 고민하고 씨름하던 밤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는 재능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세상에 어디 그리 쉽게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있는가?
의식하지 못한 채로 쌓은 어제와 오늘이 내일의 나를 만든다. 다만 우리는 내일의 내가, 모레의 내가 무엇이 될지 알 수 없기에 그저 하루를 흘려보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색으로 물들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어떤 나를 꿈꾸는가? 새로운 내일을 그리는 것보단 안 되는 이유를 찾는 것이 더 쉬운 서른이 된 지 오래라 무엇을 꿈꾸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경험에 근거한 꾸준함의 힘만큼은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내가 좋아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다 보면 나도 멋진 색으로 물들어 있지 않을까? 오늘의 나를 알록달록한 색으로 채우고 싶다. 다양한 글들을 읽고, 할 수 있는 시도들을 하며, 꾸준하게 글을 써보고 싶다. 5년 뒤의 나 역시 꽤나 그럴싸한 멋진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