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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봇 Sep 14. 2020

15. 아빠와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더 많아진다.

B급에서 A급이 되고 싶어졌다.

15. 아빠와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더 많아진다


 지난 6월 6일, 현충일이 다가오는 주간에 집을 내려갔다 왔다. 우리집에는 불문율이 있다. '6월 6일' 현충일이 되는 때에는 말하지 않아도 집에 내려간다는것.


"이번 주에 올거지?"


 어김 없이 엄마로부터 6월 6일에 맞춰 집에 내려올 거냐고 당연하게 묻는 전화가 왔다.


"응, 내려가야지."


 그 전날 퇴근하고서 바로 집에 내려갈 거라는 묻지 않은 말을 덧붙이고 평소에는 현금을 넣을 공간이 없는 카드지갑에 만원짜리 두 장을 구겨 넣었다.


 6월 6일 현충일에 집에 내려가는 것은 아버지가 계신 국립현충원을 가기 위함이었다.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서 현충원에 가셨고, 다행히 집은 대전이었기에 멀지 않아 이따금씩 가서 아버지의 비석을 닦고 꽃을 갈고 인사를 드리는 것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 년도는 조금 달랐다. 달라진 것은 두 가지로 비석을 닦는 사람과 꽃을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6살이 되어서 자기 의사표현도 잘하고 자기들이 보기에 제법 예쁜 것도 고를 줄 아는 쌍둥이 조카가 꽃을 골랐고, 비석을 닦아야 할 때에는 물티슈를 내가 아닌 그들이 뽑아 정성스레 닦았다.


"여기 안닦았네?"


 하는 소리면 너나 할 것 없이 경쟁하듯 서로 그 자그마한 손으로 아버지의 비석을 박박 문질렀고, 나는 더 이상 세워져 있는 내 손이 많이 닿은 아주 익숙한 그 비석을 닦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웃으면 안되는 그 자리에서도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우리 엄마도 그랬다. 이제는 그 자리가 언제나 슬픔을 표해야 하는 장소가 아닌지는 시간이 제법 지났었고, 자연스럽게 웃으며 '또 올게요.' 하는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나는 양 손을 뻗어 쌍둥이의 손을 잡았다.


 여섯 살이 된 쌍둥이의 행동을 보면서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감을 느꼈다. 언제나 오면 칭얼대기 일쑤였고 힘이 많지 않고 키가 크지 않아 비석의 머릿부분까지 닦지 못했던 그 아가들이 이제는 자기가 하겠다며 말을 하고 말하지 않아도 비석의 머릿부분까지 제법 깨끗하게 닦아 내는 어린이가 되어 있었다.


 시간이라는 게 이렇게 지나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을 때, 문득 생각이 나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는 내가 태어나서 아빠랑 함께 산 시간보다 이제 함께하지 않은 시간이 더 많아진다?"

"벌써 그렇게 되나?"

"아빠가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으니, 이제 곧이지."


 내가 이제 비석을 보면서 웃을 수 있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아버지를 지운 채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졌다는 것임을, 그리고 그 시간이 제법 오래 되었음을 깨달았다.


 함께한 시간보다, 함께하지 않은 시간이 더 많아졌다.




 사실 이제 누군가에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어떤 환경에서 호구조사를 할 때에 나는 불편함이 없다. 감출 마음도 없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기는 오래전에 지났고, 그것이 측은한 것이 아님도 그리고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님에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당황'에 대해서 의연하게 넘기고 웃으면서 '괜찮아요.' 하면서 넘길 재간도 생겼다.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았던 것이 익숙해져 버리고 그것이 일상이 되어 내게는 하나의 여운도, 하나의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시간이 약'이라는 것은 이런 것을 염두해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상처가 났을 때, 그것도 아주 깊게 났을 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결국은 남는 '흉터'라는 것이 있다. 내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것은 그런 '흉터', 상흔을 보았을 때이다. 오래되어서 이미 새 살이 돋아버린 흉터는 내가 자극을 해도 하나의 통증도 없다. 다만, 그냥 그 상흔을 볼 때마다 '좀 더 조심할 걸.' 하는 아쉬운 마음을 가지는 그것과 같다.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음 좋았을 걸.'


 그리고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나는 이제 아빠하고 같이 있었던 시간보다 아닌 시간이 많아져. 엄마도 근데 이제 점점 그럴텐데 엄마는 어때?"


 어렸을 때 겪은 상처는 어린아이의 비약적인 재생속도로 지금은 크게 상처가 남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때는 부모님이 결혼한 지 23년 째가 되는 날이었다. 부모님이 결혼한 지는 36년 째, 그러니까 이제 엄마도 약 13년만 있으면 아빠와 함께한 시간보다 함께하지 않은 시간이 많아진다.


 하지만 나이가 들 수록 재생속도는 느려진다. 10살의 재생속도와 20살의 재생속도는 다르고, 지금 나의 재생속도도 다르다. 해가 갈수록 느려지는 것을 체감하는 요즘, 이제 환갑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엄마는 이미 재생이 늦기에 그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나 보다.


"지금도 보고싶지."


 그리고 엄마는 나보다 더 큰 상처를 입었던 사람이니까, 지금도 아픈 것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지금 스물아홉이 된 나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한다면 정말 말이 잘 통할까 하는 그런 생각. 


 어렸을 때에는 군인이셨던 아버지의 무뚝뚝함보다 엄마의 부드러움이 더 익숙했기에 이따금 부자만 남겨진 우리 집에서는 많은 대화가 있지 않았다. 있었다 하더라도 기억의 풍화로 이제는 둘의 담화는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상식도 많이 늘고 정치 이야기도, 주식 이야기도 즐겁게 나눌 수 있는 지금이라면 나는 부자 단 둘만 남은 그 집에서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생각보다 집에 일찍 들어온 우리 집 모녀에게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왔어 한참 재밌는 이야기 중이었는데!'라고 핀잔을 주고 눈을 맞추며 웃을만큼 능청스러울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이 모든 것은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나의 가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외계인이 내게 갑자기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그런 가정과도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버지 비석 앞에서 묵념하며 '나는 잘 살고 있는 게 맞을까?' 하고 묻는 내면의 독백 때문에라도 나는 이 가정을 멈추지 못할 것이고, 매년 나는 또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함께한 시간보다 함께하지 않은 시간이 더 많아지기 시작하기에 이런 나의 가정은 점점 더 많아진다. 온전히 내 선택으로 모든 일을 헤쳐나가야 하는 나의 상황이 언제나 옳은 선택이길. 그리고 아버지 비석 앞에서 '나 잘했죠?' 하는 질문만 하고 '왜 일찍 돌아가셨나요.' 하는 원망은 없길. 


 내년 6월 6일에는 '잘 살고 있어요.' 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내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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