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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봇 Feb 24. 2021

이별의 가해자 코스프레

ep.51 권진아_끝


 최근 4년 정도 연애를 하고 심지어 동거까지 하고 있던 친구가 연애에 큰 위기가 찾아왔음을 공표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안되냐고 슬픈 전화를 걸었다. 그 커플은 내가 그 집에 방문하여 술까지 자주 마셨을 정도로 친숙했으며 그들의 연애는 순탄해 보였다. 오죽하면 "나도 너희들 같은 연애를 하고 싶어."라고 이야기했을 정도였으니.


 그 친구는 이별의 신호를 잡은 채로 우리 집으로 짐을 들고 피신을 왔다. 동거를 하다 보니 반드시 마주쳐야 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솔직히 말하는 그 제법 수척하고 어두운 얼굴에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흔쾌히 집을 그에게 공유했다.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연애를 해본 적도 없고 동거는 더더욱이 해본 적 없는 나는 그들의 관계를 이 얕은 잣대로 이야기하고 싶지도, 말할 수도 없었기에 없는 사람인 것처럼 나의 할 일을 했다.


 그렇게 사흘 째 되는 날, 잠에 들기 위해 누웠을 때 그 친구는 내게 물었다.


"형은 대부분의 연애에서 먼저 헤어지자고 이야기하는 편이었지?"

"그런 경우도 있고, 나도 이별을 듣기도 했지."

"대개는?"

"그런 편이었던 것 같아."

"먼저 헤어지자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안 힘들겠지?"


 나의 지난 연애들을 곱씹어보자, 입 안에는 쓴맛이 감돌았다. 그렇게 까지 깔끔하지도 그리고 괜찮지도 않았던 그런 순간들을 다시 한번 떠올리는 건 제법 슬픈 일임을 실감했다.


"왜 안 힘들겠어."




  이별의 순간, 먼저 이별의 운을 떼어야 하는 순간의 경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서로의 다툼으로 인해 한층 격앙된 감정에서 이야기하는 이별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에서 마음이 점점 사랑이 식어 누군가는 이별을 말해야 하는 바로 그 순간, 그 순간에 이별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고 나를 보는 상대방에게 고하기란 몹시 어렵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헤어지자'는 말보다는 '이제 그만하자'라는 말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

"내 마음이 예전 같지가 않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라는 말을 돌려서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상대방이 느낄 수 있는 그 충격의 크기를 공감할 수 있기에 최대한 상처 받지 않도록 돌려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의 표정을 보면 애초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나는 시선을 제대로 마주칠 수 없게 되었다. 언어는 중요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냥 원래 이별은 폭탄이고 그 순간은 폭탄을 건네는 아주 개 같은 순간일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 폭탄에 불을 '누가' 붙이고 '누가' 건네는가, 이것 하나였다. 


 그리고 나는 그 '폭탄'을 선사해 터뜨려 상처 받은 표정을 짓게 한 사람이 되었으니, 그 순간부턴 가해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의 시간에는 머리가 멍해지고 '후회'가 감돈다.


'내가 조금 더 노력했으면 괜찮았을까?'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뭐라고 이 사람한테 상처를 주는 걸까?'


 벌어진 일에 대한 후회, 하지만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그럴만한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기에 말을 아낀다. 침묵이 지난 이후 상대방의 입에서 처음 나오는 말들은 다양하겠지만, 어차피 그 순간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이상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 어차피 상대방에게 폭탄을 던졌으니, 그 사람의 투정이나 분노나 슬픔을 모두 들어주는 것은 다음 나의 몫이 된다. 그 사람이 쓴웃음을 지으며 침묵을 유지했다면, 그것은 내게도 큰 상처가 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밀려오는 우울감은 한 때는 사랑을 나눴으며, 지금도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람을 상처 입혔다는 생각의 칼날로 변모해 가슴을 찌르고 정신마저 오염시켰다. 한탄마저 할 수 없는 순간은 제법 오래 지속이 된다. 


 내가 이별을 듣는 당사자가 되었을 땐 주변 사람에게 연락을 해서 '차였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런 상황을 경청하고 "이제는 욕할 수 있다"며 실컷 욕해주는 그 친구들 때문에라도 피식 웃으며 휘몰아친 감정의 폭풍우와 소용돌이를 잠재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 편하게 전화해서 '헤어졌어, 내가 찼고.'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했을 때, '너 괜찮아?'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언제나 '왜?'라고 의중을 묻는 사람들이 더 많았으며,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데에 이유가 있을까'라고 단출하게 만나 소주라도 마시고 있으면 대화는 곧 없어진다.


"괜찮아, 잘했어."


 아마 들을 수 있는 위로 중, 내가 한 행동이 그렇게까지 잘못된 건 아니라는 말이 가장 최고의 위로는 아니었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dbBMt5DNEtY

[ 권진아 - 끝 ] - 유희열의 스케치북



 그런 지극히 정상적인 이별을 겪고 그 이별을 먼저 말하는 스트레스를 어느덧 알아버린 우리는 이후에는 아이러니를 마주하곤 한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덜 좋아하는 사람을 향해 이별을 말하는 그런 풍경 말이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왜?"

"네가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잖아."


 사랑하는 상대방이 예전 같지가 않고 변해간다는 것을 마주하는 순간은 제법 위태롭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던 것은 아닐까 전전긍긍하게 되고 혹시 문제가 되는 건 없었을까 기억의 편린을 헤집으며 문제점을 찾으려고 한다.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을 수 없는 순간 용기 내어 묻는다면, 


"아니? 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돌아오는 지극히 평범한 대답. 하지만 상대방은 과거와 같지 않고, 주고받는 메시지는 담백해졌으며,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닫는 빈도는 잦아졌고, 답장의 텀은 제법 길어졌다. 상대방이 변해간다는 것을 실감했음에도 '너 변했네.'라고 먼저 섣부르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도화선이 될 수 있는 빌미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 절반과 혹여라도 마주해야 할 가혹한 진실의 상황을 외면하고픈 간절함이 절반 더해져서 입을 앙다물게 했다. 하지만 앙다물기를 넘어 질끈 물은 입술이 아리기 시작하고 그 시간이 제법 오래가다 보면 피가 나고 곪기 마련이었다.


 아주 지극히 좋았던 날씨에 데이트를 하기 위해 나갔고, 짧은 대화만이 오가는 레스토랑 그리고 너의 이목 끌기 경쟁에서 평소에는 재미없다고 볼멘소리를 늘어놓던 그 휴대폰 게임에 마저 져버렸던 나는 그 카페에서 초라함을 느꼈다.


"집에 들어갈까?"

"아, 그럴까?"


 왜냐고 되묻지도 않고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너를 보면서 비참함을 느꼈다. 


 누가 봐도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나만 꼭 붙잡고 있는 그 끈을 청산하기로 마음먹은 그 날, 나는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갑자기 왜?"


 어떻게 말할까? 그 날의 데이트 계획에는 나의 이별 선고는 없었고 우발적으로 저지른 말에 나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먼저 이별을 이야기했던 나는 그 사람의 눈을 마주 보기 싫어 고개를 숙였고 잠깐의 침묵 이후 무슨 말을 할까 고민했으며, 혹시나 싶어 고개를 들어 당황함이 없는 올곧은 그 눈빛을 마주했을 때 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네가 날 안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는데 만나는 내가 가련해서."




 먼저 이별을 말하지 않는 그 사람들의 핑계는 많이 있다.


"잠깐의 권태기야. 조금 쉬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나를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에게 모진 말을 못 하겠어."


 하지만 그 휴식은 상대방에게는 분명 아주 큰 고통의 시간이며, 모진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과 배려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연민과 그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다. 


 서로가 연애를 처음 시작했던 그때에는 연민이 아니라 사랑이었고, 나에게 휴식은 그 사람에게도 휴식이었다. 연애에서 느끼는 나의 고통은 상대방의 고통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놓아야 하는 그때에 놓지 못하는 아이러니로 인해 결국 고통의 기울기는 한쪽으로 치우쳤고 그 아픔을 아는 당신은 연민만을 느꼈을 것이다.


 아마 그래도 차였던 당신은 기분은 좀 나았을 것이다. 방아쇠를 먼저 당기지 않아도 되었으며 자신은 상처를 입힌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실감했을 것이고, 아마 적당히 친구에게 '헤어졌어, 걔가 날 차더라.'라고 이야기하면서 나를 아주 못된 개자식으로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 순간에도 가장 슬픈 건 나는 가해자의 스트레스를 온전히 받고 있었다는 것이고, 제법 오래 앓은 고통 때문일까 방아쇠를 당길 때의 반향은 제법이나 큰 후유증으로 남더라.


 그래도 어쩌겠어.


"내가 갈게, 애써 미안한 척하지 마."


 넌 준비했었고, 좋은 이별의 시나리오를 그렸을 테고, 그 적절한 때가 언제인가 나를 보며 재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별의 준비를 하기 싫었고, 이 불균형적인 관계에서 좋은 이별은 없음을 알고 있었으며, 내게 정을 떼며 내 눈치를 보는 널 보는 게 싫었다.


 그러니 나는 내게 폭탄을 넘기지 않는 네게 폭탄을 넘기는 가해자가 될 수밖에.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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