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미 Mar 11. 2021

엄마의 완벽한 꼬마 자동차

ep.53  Newton Faulkner - Lipstick Jungle


- 엄마 차 뽑았다.


전화 너머로 아빠의 신나는 목소리가 들리고 곧 카톡으로 사진이 날아왔다. 귀여운 모닝 한 대가 서 있었다.


- 어? 엄마 운전 싫어하잖아?



엄마의 면허증은 장롱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오래'라는 애매한 단어보다는 '어언 15년'이라는 다소 정확한 기간을 얘기하는 편이 낫겠다.

어릴 때 기억으로는 종종 아빠의 차를 몰고 다니기도 했던 엄마는 어느 날 코너에서 꺾어 들어오는 트럭을 미처 못 보고 쿵 박은 뒤로 차에서 손을 뗐다. 가끔 술을 마신 아빠를 대신해 엄마가 운전대를 잡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이제 술 먹은 아빠 대신 운전대를 잡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로는 대리 운전으로 대체되었다가 최근에서야 나에게로 그 역할이 넘어왔다.

엄마는 정말 그 후로 운전대를 단 한 번도 잡지 않았고 엄마의 운전면허도 강산이 변하는 세월 동안 장롱에 고이 잠들었다.



"엄마도 이모들이나 친구들 만나러 갈 때 차 하나 있으면 편하지 않아? 버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고."


시내에서 집까지 오는 마을버스는 늘 배차 간격이 뒤죽박죽이었다. 한 대를 놓치면 30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했지만 엄마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필요 없어. 시간도 많은데. 출근할 때야 아빠랑 늘 같이 가고.

가만히 있어도 스트레스받을 일 많은 세상에서 굳이 스트레스받을 거리 늘리기 싫어."





딸의 눈으로 본 엄마는 늘 완벽한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본인이 할 줄 아는 것만큼은 완벽하게 해내고야 마는 사람.

환자를 대하는 간호사로서도, 가정에서의 아내, 엄마로서도, 엄마는 늘 소홀했던 적이 없었다. 취미로 문화센터에서 배우기 시작했던 서예나 포크아트도 연말 발표회를 열 때쯤에는 전문가 수준의 작품을 완성했다. 동네 산만 가도 머리가 어지럽다던 엄마는 얼마 전 지리산과 한라산 정상을 찍었다.


반대로 말하면 엄마는 잘 못하는 것에는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본인의 담력을 시험해야 하는 놀이기구는 애초에 타지 않았고 복잡한 IPTV 리모컨을 건드리느니 대신 라디오를 듣는 식이었다. 완벽한 스스로를 원하는 엄마에게는 무언가를 한번 시작하면 본인이 만족하는 수준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것 또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아마 엄마가 운전을 싫어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았을까,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엄마가 편안하게 만들고 살아온 완벽한 세계 안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나온 것은 얼마 전이었다.



한 달 전, 엄마는 16년간 해오던 병원 간호사 일을 그만두었다. 결혼 전 큰 병원에서 수간호사로 일했던 것까지 합하면 3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해왔던 하나의 직업을 그만둔 것이었다.

예상대로 일을 그만두고 얼마까지도 엄마는 자주 울적해했다. '앞으로 뭘 할지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야'라는 엄마를 조용히 지켜보면서도 내심 걱정이 되었다.

이제 일도 관뒀겠다, 작은 차라도 하나 사 줄 테니 여기저기 몰고 다녀보라는 아빠의 말에도 엄마는 됐네요~ 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엄마에게 내키지도 않는 차를 덜컥 사줬다고? 또 안 타고 몇 날 며칠 세워두는 것 아니야?

내 우려와는 다르게 엄마는 새 차가 도착한 다음날부터 7일 중 5일을 차를 몰고 나갔다.


 


 



스물다섯, 두 번째 직장에 들어갔을 때 맞닥뜨린 생각지 못한 복병은 운전이었다. 행사 업계 특성상 물품을 옮길 일이 많은데 그때마다 큰 카니발을 운전할 수 있는 직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아무도 스물 다섯 신입 여직원에게 운전에 대한 기대를 걸진 않았다. 여직원이 운전하는 것이 영 불안한 윗분들에게 남자 직원이 운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저 필요할 때면 운전을 잘하는 남자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매번 혼자 가도 충분히 끝날 일을 두 사람이 움직이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운전을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나란히 들어온 남자 동기가 나 대신 새로운 업무에 투입되는 것도 영 자존심이 상했다. 곧 얼마 안 되는 월급을 쪼개 퇴근 후 운전 연수를 신청하고 주말이면 차를 빌려 서울, 대전, 경기도를 쏘다녔다. 어느 날 큰맘 먹고 출장길에 내게 운전대를 쥐어준 팀장님은 회사에 돌아와 이사님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이사님, 타미씨 이제 운전 잘해요."


물론 팀장님 외에는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렴 어때. 나는 이제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는 걸. 운전이 필요한 업무가 들어와도 이젠 남 줄 필요 없는, 아주 강력한 스킬을 획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감을 높여주기엔 충분했다.

운전은 나에게는 새로운 미션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든든한 신형 아이템인 셈이었다.






15년 만에 운전대를 잡은 엄마는 다시 완전한 초보이다. <초보운전> 스티커를 창문에 붙인 채 외삼촌의 가이드를 받으며 조심조심 차를 모는 엄마의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어 보이는 건, 30년 가까이 봐오던 완벽한 엄마의 모습과는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 지금 앞 차가 라이트를 켠 건가?

- 이제 차가 중앙으로 잘 오는 것 같은데 맞지?


엄마의 작은 차 뒷자리에 앉으니 백미러에 비친 잔뜩 집중한 엄마의 눈이 보인다. 아직 속도를 60km까지 내려면 진땀을 빼고 클락션 누르는 건 민폐라며 질색하긴 하지만, 새로운 스트레스의 세상에 기꺼이 뛰어든 엄마가 반갑다.

스물 다섯의 나에게 운전이라는 스킬이 든든한 아이템이 되었듯, 엄마의 작은 꼬마 자동차도 엄마의 새로운 인생에 완벽한 아이템이 될 테니까.





https://youtu.be/waa8BE_m9yk



수요일에 쓰기 시작했지만 목요일에 끝나버린,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의 이번 주 소개 곡은

Newton faulkner의  lipstick jungle. 봄날의 드라이브에 딱 어울리는 곡이에요.


조금씩 퇴근길 하늘이 밝아지는 요즘 선선한 봄바람과 함께 달리며 들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꼭 자동차가 아니더라도 자전거든, 킥보드든,

또는 두 다리로 달리며 들어도 가장 완벽한 선곡이 될 테니까요.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별의 가해자 코스프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