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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Mar 17. 2021

전 여자친구를 만났습니다.

ep.54 노을 - 늦은 밤 너의 집 앞 골목길에서


전 여자친구를 만났다.


카톡으로 연락이 와서 이런저런 근황들을 나누다, 저녁에 두 시간 정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왔다. (덤덤하게 쓰는 척 하지만 처음 카톡이 온 순간, 그리고 약속을 잡기까지 수십 번을 고민하고 마음도 요동쳤다)

헤어진 연인을 만나러 나가는 길에 신경 쓰이는 일이 왜 이리도 많은지. 가장 잘 어울릴 옷을 고르고, 머리도 매만지고. 설렘보다는 긴장이 더 앞선 감정 같았지만 나 스스로도 어떤 감정인지 정의 내리지 못했다.

연인일 때 항상 데이트하던 천안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천안역에 도착해 역사를 올라가자 그녀가 보였다. 연인일 때 항상 멀리서 알아채면 서로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안아주었는데. 잊힌 기억 한 조각이 벌써부터 떠오른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어색한 거리를 두며 나란히 걸어 카페에 들어갔다.


연애 당시의 이야기들을 나누며, 간단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던 순간도 있고, 다른 기억들은 한쪽의 설명으로 퍼즐이 맞아간다. 전혀 다른 기억들도 더러 있었다. 특이하게도 가장 마지막 이별 장면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허나, 끝까지 매달렸던 내 기억이 맞을 것이다. 천안역 버스정류장에서 그녀는 버스에 올라탔고, 나는 그 버스 창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헤어지고 나서의 약 1년 반 근황도 이야기한다. 당시 학생이던 전 여자친구는 어느새 직장인 신입이 됐고, 당시 신입이던 나는 2년 차 사원이 되었다. 잠이 늘고 눈가의 총기가 사라진다는 이야기, 팀장과 회사에 대한 험담 등. 연인일 때와는 다소 다른 이야기지만 어색한 기운은 없다. 오히려 둘 다 직장인이 되어 대화의 공통점이 더 생겨서일까, 소개팅처럼 그런 일상들이 공유되고 대화에 스며든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 드디어 헤어지고 서로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을 나눈다.
그녀는 내 평범한 삶에 끼어든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잔잔한 파도에 돌 하나 던지듯, 잘 지내고 있을 텐데 연락을 했다는 미안함이었다.
반대로 나는 연애 당시 그녈 서운하게 했던 일들에 사과를 했다. 서운하게 해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 조금만 참으면 없었을 작은 다툼들을 사과했다. 인스타로 근황을 보고 싶었는데 매 번 비공개라 볼 수 없었다는 말을 했고, 나와 헤어지고 만난 그녀의 전 남친은 참 못생겼었다고도 말해줬다. 그러자 그녀는 매운 걸 잘 못 먹는 나한테 같이 먹자고 졸랐던 것이 미안하다고 한다. 헤어진 인연들에게 시간이 주어지면 온통 고맙고 미안한 마음만 남는다.

그녀가 달라진 건 많이 없었다. 외모나 목소리, 특유의 패턴이나 분위기 등. 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헤어진 지 1년 반은 누군가에겐 오래된 시간일 수도, 짧은 시간일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의 외형과 분위기가 극적으로 바뀌기엔 짧은 시간일 것이다.


그럼에도 달라진 건 하나. 서로의 마음만큼은 그때와 달라져있다. 그 하나가 달라졌지만 그것이 전부였으니 아주 많은 것들이 달라져버렸다. 이다음에는 무슨 이야길 해야 하고, 좁은 길에선 누가 먼저 걸어가야 될지 몰라 어색하게 먼저 걷고, 카페에서 나갈 때 문을 어떻게 잡아줘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는 사이. 그렇게 물리적, 심리적으로 어색한 거리 속에 우린 만남에서 헤어졌다.

돌아오는 기차역에선 괜스레 눈이 조금 붉어졌다. 한참 오고 갔던 천안역이 이랬구나, 네 모습은 또 그랬구나. 조금만 일찍 연락해주지 그랬어하는 생각들. 에어팟에서 노을 - 늦은  너의   골목길에서 라는 노래가 나오자 단단히 쌓아온 감정과 벽들이 마음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노을 - 늦은 밤 너의 집 앞 골목길에서


시간의 위로 그 말의 의미를 이젠 알아
아픈 니 얘기도 적당히 할 수 있어
그런데 이게 뭐랄까 난
난 술 한잔 하면서
괜찮은 듯 얘기하며 널 털어냈는데
집으로 돌아오면서 한 번 더 떠오른 기억에
걸음을 멈춰 서서 이렇게 울고 있어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게 지금 서로의 추억들을 행복하게 그 자리에 묻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해결되지 않았던 일들이 지금 와서 해결될 수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균열이 일어난 곳은 메워도 그 속까지 채워낼 순 없다. 평생 그 갈라짐을 없는 척 살아갈 용기 역시 없다는 생각을 다 잡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 안에서는 피천득 작가의 문구가 떠올랐다.


그리워하는 데도   만나고는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만났다.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그리워하던 사람을 한 번 만나보았다. 일생을 못 잊고 아니 만날 줄 알았는데, 먼저 연락 와 한 번이나마 본 것으로 만족하며 정리한다. 나 혼자만 그 시절을 그리워한 건 아니구나, 나 혼자만 열렬하게 사랑한 건 아니구나 하는 것을 확인받는 것 같아 고마웠다. 내 일기 정말 많은 부분이 너였는데, 용기 내 연락 줘서 고마웠다. 행복한 기억과 아픈 기억들은 그 자리에 묻고, 우리 모두 더 행복한 날들로 나아가기를.




햇수로도 이제 3년이 다 지난 글. 이 글은 그 사람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작성했던 글이다. 어떤 주제로 글을 쓸까 주변에 물어보니, 사랑이란 주제로 써보는 걸 많이 추천받게 됐다. (봄은 역시 사랑의 계절인가?) 블로그에 썼던 내용을 조금 다듬어 수플레에도 담아본다.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봤고, 겪어봤을 법한 경험. 사랑은 여전히 참 어려운 감정이다. 평생을 살며 사랑을 명쾌하게 정의 내릴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모르겠다.


각설하고, 다시 또 봄이다. 새로운 봄엔 더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인연으로 나아가길 바라며. 우리 모두 행복하길.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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