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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봇 Aug 18. 2021

아무튼 이직

EP72. 가호 - 시작


 서른, 수플레에 처음으로 합류해서 썼던 글에서 기술했던 나는 꽤 행복한 사람이었다.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제법 의연해지고 스무 살에 바라봤던 서른이 사실은 그렇게까지 대단할 필요가 없었음을 깨달았던 그야말로 제법 초탈한 존재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인생을 조금은 더 재미있게 살고 싶어 도전과 투자에 제법 과감해진 회사원 A 씨였다. 글도 썼으며, 공부도 했고, 독서도 했다. 특히 업무를 조금 더 잘하기 위해서 도전했던 SQL 학습은 아주 빠르고도 성황리에 마무리하여 회사에서는 꽤나 인정받는 마케터가 되어 있었다.


 연초 마음에 들지 않는 올해 업무 방향을 바꾸고 싶은 나머지 윗 분들을 설득하기 위해 40장에 육박하는 보고서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인정을 받았고 꽤나 큰 프로젝트의 메인 PM을 맡아 리드를 할 수 있는 기회마저 주어졌다. 프로젝트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 부족한 역량에 대한 인지는 새로운 학습으로 귀결되었고 제법 많은 업적을 내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산출물들이 나왔다.


 그리고 상반기가 지나고 내가 했던 꽤 큰 프로젝트의 80% 이상이 마무리가 되었을 때, 내가 했던 일들을 되짚기 위해서 했던 업무들을 노션에 이래저래 기재해보았다. 새로운 것을 기획하였다면 기획의도는 무엇이었는지를 목표로 했던 것은 무엇인지, 기획하면서 가장 고려했던 점은 어떤 것이고 실제 아웃풋은 어떻게 나왔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땠는지 곱씹어가면 정리하였다. (물론 confidential으로 해야 하는 것들은 당연히 잘 숨겼다.)


 그렇게 Notion을 통해 정리한 포트폴리오, 사실 포트폴리오라 하기에는 한없이 빈약했고 경력 기술서를 조금 더 시각화하고 정리한 내역에 가까웠던 그것을 큰 기대 없이 이직을 할 수 있는 플랫폼에 여럿 올려놓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hWYM5QEt0Fg

[ 가호 - 시작 (이태원 클라쓰 OST) ]


 그것을 보고 여러 회사와 다른 헤드헌터들을 통해서 연락이 받았으며,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아무튼 이직' 하게 되었다.




 막상 합격하여 이직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당황스러웠다. 준비된 것도 없는 느낌이 먼저였고, 그리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팀에는 언제 공개해야 할지, 연봉협상은 어떻게 하는 건지, 퇴직 절차는 어떻게 밟아야 하는 건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갑자기 해야 할 일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인수인계 일정을 짜고 업무를 넘겨줘야 하는 후배에게 하나하나 가르치기 위한 매뉴얼을 조금이나마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친했던 동기들에게, 그리고 선배들에게 은근하게 티타임을 갖자 이야기하면서 대면하게 되면 '나 이제 떠나'라고 이야기했다.


 그들의 표정은 축하, 아쉬움, 부러움, 안타까움이 섞인 복잡한 것들이었다. 그들이 보는 내 표정은 어땠을지, 나는 정말로 모르겠다. 나의 표정은 행복, 아쉬움, 후련함, 미안함 그리고 걱정이 섞인 아주 미묘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조금은 나도 더 성장할 수 있는 곳으로 간다는 행복감, 그리고 정들었던 곳과 함께 일했던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아쉬움, 내가 했던 것들이 다른 회사의 사람들이 보기에도 제법 괜찮았을 거라는 후련함, 그리고 먼저 말하지 못했다는 미안함.


 그리고 동시에 새롭게 가는 회사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리고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한 걱정까지, 아주 다양한 감정이 섞인 그 표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직이 성공하면 앞으로는 행복만 있을 줄 알았다. 그렇지만 사람이란 언제나 두려움을 가지고 걱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동물이었나 보다. 포트폴리오를 준비할 때에는 이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을, 면접을 봐야 할 때에는 내가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을, 면접이 끝난 뒤에는 내가 말한 것에 문제는 없었을까에 대한 뒤늦은 걱정을. 그리고 합격을 하고 나서는 그 회사에서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을.


 그래서 생각해 봤더니, 나는 좋은 일에 대해서도 그다음의 일을 걱정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서른이 되어 처음으로 썼던 그 글에서는 그렇게도 행복해지기 위해 여러 것들을 할 것이라고 자부해 놓고서는 답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내려놓고 즐기기 시작했다.


 인수인계도, 준비도, 앞으로 다가올 휴일도, 그리고 잘 모르겠는 그 출근 첫날도.





 새로운 시작은 늘 설레고, 걱정도 된다. 나이를 먹으면서 특히 새로운 도전이 더 어려워지기 때문에 새로이 마주하는 것이 생경하기 때문일 것이고, 몇 없는 선택의 순간에 내가 택한 결과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튼 이직한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만큼, 내가 한 선택에 후회 없도록 그리고 지금보다는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힘차게 움직이기 위해서 나는 더 버티고, 더 기운을 내려고 한다.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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