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4. 혁오-TOMBOY
출근길에 오랜만에 블로그에 댓글이 달렸다는 알림이 울렸다. 예전에는 웹툰을 그려 올리던 블로그였지만 지금은 가끔 영화나 책을 본 후기나 일상 글을 올리는 개인적인 용도의 블로그다.
'또 부업 광고 댓글인가, '하고 무심히 블로그를 열었다. 2013년에 그렸던 만화에 달린 댓글이었다.
6년의 세월을 지나 감사한 마음을 전하러 오랫동안 묵혀있던 글을 다시 찾아온 한 독자분의 댓글. 출근길에 괜히 코끝이 찡해 꾹꾹 자판을 눌러 답글을 달았다.
수많은 직장인들과 함께 평범하게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던 직장인 1은 선물 같은 댓글 하나로 굉장히 특별한 직장인+이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나는 오랫동안 고마운 사람이었구나. 나도 누군가에게 특별한 위로를 해주던 특별한 사람이었어.
스무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나의 가장 큰 이름표는 웹툰 작가 '팡이'였다. 처음엔 친구들의 이야기를 그려서 올린 그림을 함께 보며 깔깔대던 것에서 시작했다가 조금씩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쓰기 시작했다. 스무 해의 시간 동안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생각들은 열심히 글과 그림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주제는 주로 연애나 인간관계, 꿈에 대한 그동안의 생각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에피소드였다. 친구들, 교수님, 엄마, 아빠와 나눈 수많은 대화들은 풍부한 소재가 되고 매주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들어져 블로그에 올라갔다.
그렇게 잘 그린 그림도 아닌데도 재미 삼아 그린 웹툰에 '공감이 간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스무 살의 나는 점점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그냥 내 얘기를 하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재밌게 들어주네!
어느 순간 싸이월드에서부터 조금씩 유명세를 타던 웹툰은 어느새 주변 사람들도 '어? 나 그거 봤는데. 네가 그린 거였어?'라고 질문을 들을 만큼 알려지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관심은 생소하지만 신기하고 뿌듯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내 생각에 사람들이 이렇게나 공감을 해준다는 사실이 신이 났다. 새벽까지 작업을 하고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업로드를 마치고는 몇 번이나 확인을 하고서야 침대에 누워 뿌듯하게 잠이 들었다.
눈을 뜨면 지난밤 올린 글에 달린 댓글을 열어보는 것이 아침 일과의 시작이었다. 처음엔 지인들 위주였던 댓글창에 어느 순간부터 모르는 사람들의 댓글이 하나 둘 달리기 시작했다.
글과 그림으로 위로를 받았다, 공감 가는 웹툰을 그려줘서 고맙다는 댓글도 달렸다. 그런 댓글이 달릴 때면 신기하면서도 고마웠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길래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글에 이런 진심 어린 댓글을 달아주는 걸까?
댓글을 다는 독자들의 연령대도 다양했다. 주로 고등학생이나 이십 대 초중반의 학생들이 많았지만 가끔 40대, 50대 분들이 길고 정성스러운 댓글을 남겨주는 경우도 있었다.
늘 작가님이 올리는 만화 즐겨보고 있는 50대의 아줌마예요. 팡이 님의 생각들이 담긴 글을 보다 보면 이렇게 생각도 할 수 있구나, 나도 예전에 이런 생각을 했었지... 하면서 울고 웃고 공감하며 본답니다. 앞으로도 자주 올 테니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그러다 보니 가끔 댓글로 나이를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렇게 말로 표현하기 어렵던 감정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걸 보니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한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왠지 내 나이를 말하기는 망설여졌다.
아직 이십 대이고 대학생이에요,라고 대충 말하곤 했지만 내 나이는 겨우 스물한두 살. 내 그림과 글을 좋아해 주던 사람들도 내 나이를 들으면 '에게, 겨우 그 나이에 뭘 안다고'라며 등을 돌릴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하는 얘기에 마냥 '어린애가 뭘 안다고'하는 딱지가 붙지 않을 수 있는 나이가 되고 싶다.
내가 하는 말에 제법 경험의 무게가 더해져 힘이 실리는 나이. 내가 하는 말에 자연스럽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나이. 나는 빨리 그 나이가 되고 싶었다. 그때가 되면 몇 살이냐고 물어보던 독자들에게도 당당하게 얘기해줘야지. 내가 생각하던 그 나이는 딱 스물네 살이었다.
스물네 살쯤이면 내 얘기를 좀 더 당당하게 할 수 있겠지. 쌓인 시간이, 경험이 나의 말의 무게를 만들어주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스물네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처음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 때문이기도 했지만 웹툰을 그리기를 아예 멈추게 되었던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원하던 바로 그 나이가 되었을 때였다.
가끔 시간이 날 때면 다이어리를 펼쳐 적어두었던 소재들을 꺼내보았지만 매번 몇 컷이 넘어가지 않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글을 쓸 때면 점점 눈치 볼 곳이 많아지고 있었다. 어쩌다 SNS를 알게 된 회사 상사, 무심코 '저 웹툰 그려요!'하고 자랑해버린 학교 선배, 그리고 기존에 나의 글을 읽어주던 (계속해서 좋은 글을 써 줄 것이라고 기대할지 모를) 독자들까지. 나는 점점 내 얘기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내가 하는 말에 자연스럽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나이. 그 스물네 살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웹툰은 업로드되지 않았다.
말의 무게가 얼마나 늘어났는지 잊고 살 때쯤 천천히 시간은 흘러 이제 서른을 코앞에 두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 누군가에게 나이를 대답해도 '엄청 어리네요'라는 대답을 듣지 않을 수 있는 나이다.
6년 전 어린 나의 글에 위로를 받았다고 말하는 한 독자의 댓글을 보며 생각한다. 지금 나의 말에는, 스무 살의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의 힘이 실려 있을까? 지금 내가 6년 전의 내가 쓴 것 같은 글을 아무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쓸 수 있을까? 그때처럼 내 이야기를 쓰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나도 모르게 위로할 수 있을까?
그때의 독자들이 나에게 기대했던 것도 세상살이에 통달한 완벽한 어른의 글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을 이제야 해본다. 그저 그 나이에 가장 어울리는 생각을 꾹꾹 눌러쓰던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추억이 되고 공감이 되었을 것이다.
몇 년 전, 우연히 구글에 웹툰 이름을 검색해보다 그 시절 영어학원에서 함께 영어를 배웠던 50대의 제니퍼가 쓴 카카오스토리 글을 발견했다. 우연히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던 길, 점심을 먹으며 제니퍼와 나눈 이야기를 그렸던 웹툰을 그녀에게 보여줬던 날 쓴 글이었다.
지금은 연락처도 없어졌고 댓글을 남기기에도 너무 오래 지나버린 시간. 지금의 제니퍼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아마 그녀는 여전히 새로운 것을 배우고, 많은 것에 신기해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을 거라 상상해본다. 여전히 또 다른 어린 친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도 새로움과 에너지를 찾으면서.
https://youtu.be/pC6tPEaAiYU
2015년 즈음 한창 인기였던 전시회 <YOUTH-청춘의 열병, 그 못다 한 이야기>를 보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젊음을 표현하다 못해 뿜어내는, 자유, 반항, 열정을 품은 유스 컬처(Youth culture)의 모습을 다룬 사진전이었어요.
젊음, 청춘. 조용히 입 안에서 곱씹기만 해도 싱그럽고 쌉쌀한 느낌이 가득 씹히는 그 단어. '청춘의 열병'이라는 그 조합은 듣기만 해도 마음이 부글부글 끓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어요. 얼른 예약을 해서 보러 간 전시회에서는 벽면에 적힌 한 구절의 가사가 눈에 들어왔어요.
슬픈 어른은 늘 뒷걸음만 치고
미운 스물을 넘긴 넌 지루해 보여
불이 붙어 빨리 타면 안 되니까
우리 사랑을 응원해
당시에는 미발매곡이었던 혁오의 'TOMBOY'의 가사 한 구절. 읽기만 해도 뭔가 슬퍼졌던 건, 언젠가 이 시간을 뒤돌아볼 슬픈 어른이 되어있을지 모를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가사를 곱씹으며 이런 가사에는 어떤 멜로디가 붙게 될까, 설레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기대하다가 공개된 완곡을 듣는 순간, 아-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가사에 딱 맞는 멜로디로 완성된 곡이었거든요.
어떤 나이가 되고 싶다. 그 바람은 '그 나이가 된 나의 모습'을 막연히 상상하는 것에서 시작되곤 했어요.
그 나이가 되었을 때 가끔은 상상했던 그 모습에서 너무 멀어져 있기도 하고, 때론 이 정도면 엇비슷하지 하고 위안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를 넘기다 보니 이제 어떤 나이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보다는 어떤 나이에 어떤 모습이 되어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든 원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제 어떤 나이의 어떤 모습을 다시 기대해 봅니다. 늘 뒷걸음만 치는 슬프고 지루한 어른이 되지는 않고 싶다고, 혁오의 노래를 들으며 바래보게 되네요.
물론 그것 또한, 그저 시간이 당연하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