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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봇 May 25. 2020

04. 집청소를 하면서 1년을 보았다.

B급에서 A급이 되고 싶어졌다.

#04. 집청소를 하면서 1년을 보았다.


 아주 평온한 약속 없던 토요일, 낮잠을 여유롭게 잤다. 눈을 뜨고 이젠 제법 날씨가 더워져 목 부분이 땀으로 조금 젖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여름 옷을 슬슬 꺼낼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옷장을 열어 어지럽게 걸려 있는 여름옷을 보면서 문득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청소를 하고, 옷을 정리해야 겠다. 내친 김에 인테리어를 바꿔볼까?'


 그렇게 토요일의 평온한 아무 일 없던 오후의 낮잠에서부터 시작된 대청소 프로젝트, 사실 대청소라고 해봐야 별건 없었다. 기껏해야 8평 남짓의 남자 혼자 사는 오피스텔인지라 크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집 안의 가구라고 해봤자 철제 수납 선반과 소파베드, 그리고 작은 목재 테이블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가구들의 배치를 바꾼다는 것은 정말 단순히 위치만 바꾼다는 것이 아님을 가구들을 집안에 어지러이 늘어놓았을 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가구를 치우면 나오는 눈에 거슬리는 먼지들부터 가구들에 비치되어 있는 소품들도 치워야 했고 바닥을 쓸고 닦는 과정을 여러번이나 반복해야했다.


  더 이상 평온하지 않게 된 토요일 오후, 갑작스런 대청소 프로젝트에서 지난 1년의 흔적을 마주했다.



[옷장에서 마주한 M사이즈의 왜소한 나]


 가장 먼저 옷장을 열었다. 작년 4월, 이사오면서 이미 많은 옷을 버렸던지라 옷이라곤 옷장 하나에 다 넣을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작년 봄과 가을에 잘 입었던 옷들 중 상당 수는 이번 봄에 전혀 입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 입을일이 있을까하는 고민을 잠시 하고는 애틋한 느낌이 들어 입어보았고, 어깨 부분이 많이 낑기고 작다는 느낌을 크게 받았다.


 옷 사이즈를 확인해보니 95(M)였다. 작년 여름에 입었던 셔츠들도 모두 꺼내보니 하나 같이 다 95사이즈였다. 혹시나 싶어 입어보면 역시나 다 어깨쪽이 많이 낑겨 썩 편하지 않았고, 모두 버릴 수 밖에 없는 옷이 되어있었다. 작년 요맘때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작년 한 해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았다 생각했던 운동이 그래도 꾸준하게 다닌 보상을 준건지, 지금 내가 마주한 감정을 선물했음을 깨달았다. 옷가지는 기본 티셔츠와 맞지 않는 셔츠, 바지 모두 합해 자그마치 30벌이나 버렸다. 옷장은 꽤 비었고 버려야하는 옷은 많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기분좋은 비움과 버림이었다. 옷장에서 지금보다는 작은 나를 마주했다.




[철제 선반 한줄 한줄에는 먼지와 함께 1년이 쌓였다]


 내가 집에 둔 철제 선반은 뒤에 받침대가 없어 벽에 붙여놔야 책이나 소품들이 떨어질 일이 없었다. 이번에 가구 구조를 바꾸면서 더 이상 철제 선반을 벽에 붙여 두지 않게 되어 책을 올려둘 수 없게 되었다. 철제 선반에서 책을 꺼내어 찬장으로 책을 다 옮기는 작업을 수 번 반복했다. 분명 작년에는 한칸도 채우지 못한 찬장이었는데, 두 칸을 거의 다 채워가고 있었다. 작년 서점에 들러 하나하나 사서 보았던 책들이 의식하지 못한 새에 꽤나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어느 덧 거의 다 채워가는 찬장의 책을 보면서 남은 칸을 채우고 싶은 욕구가 생겼고 서점을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1년 간 적지 않은 책을 읽었던 내가 제법 대견스럽기도 했다. 물론 그 책을 통해 얻은 게 있어서 그 지식을 써먹은 적이 있느냐라는 것은 아주 별개의 이야기지만, 뭐 아무렴 어떨까, 내 마음도 작년보다 찬장의 책만큼 더 채워진것을.


 철제 선반에 들어가는 소품들에도 제법 먼지가 쌓여 있어 반드시 닦아 내어야했다.


 먼저는 액자, 입사할 때 글로 쓴 나의 앞으로의 포부가 담긴 액자. 그 때 제출했던 문구를 읽으면서 3년전과 지금의 변화를 감지했다. '소명의식'과 '성과'라는 단어가 적나라하게 적혀 있는데,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쌓인 먼지가 꽤 많았었는데, 아마 이 쌓인 먼지처럼 한동안은 정말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두 번째는 작년 생일선물로 받은 디퓨저와 작은 조명. 디퓨저는 이미 다 날아가버린지 오래였고, 조명은 사용하지 않은지 벌써 반년도 넘었다. 집안에는 이미 다른 디퓨저 향이 집안을 채운지 오래였고, 조명은 이미 밝은 형광등으로 대체되었다. 디퓨저에 꽂힌 스틱을 빼 버리고, 유난히 용기가 예뻤던 병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박박 닦은 휴지에서는 잔향이 묻어나왔고, 빈 병은 여전히 예뻐 이파리형태의 스틱을 꽂아놓았다. 형광등을 끄고 반년 간 켜지 않은 조명을 켰다. 그 때는 몰랐는데, 우리 집에도 오늘의 집이나 유튜브에서 보는 그 예쁜 소품들이 제법 많았음을 새삼 느꼈다.


 세 번째는 전자시계. 처음 샀을 때보다 9분이나 빨라진 시계였는데, 빨라지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한번도 맞추려고 한 적이 없었고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왜 비정상적인 것에 익숙해졌는지 정말 모르겠지만, 혹은 1년 간 9분이면 하루하루에는 큰 영향이 없어서 그랬을까 서서히 달아오르는 물 속의 개구리가 떠올라 약간은 섬찟해져 숫자를 새로 맞췄다. 이제야 시계가 정상적으로 제 기능을 하게 되었다. 1년 간 반쯤은 비정상적인 것을 수리했다.



[부엌 찬장에서 코타키나발루, 상하이, 대만을 마주하다]


 부엌 찬장을 열었다. 바닥에 널부러뜨려 놨던 두유를 넣을 공간이 필요하여 뒤적거리다보니 구석에서 한글은 아닌 언어로 적힌 차들을 여러 개 발견했다. 어디서 나온건가 싶어 봤더니 작년 여행을 갔을 때 샀던 것들이었다. 원래 기념품을 크게 사지 않는 나한테는 사진을 제외하면 이정도가 여행의 흔적 정도였다. 그러나 여행사진이란 모름지기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유통기한은 기껏해야 한달 정도이며, 유통기한이 지나면 외장하드나 혹은 클라우드 안에 잠든다. 챙겨볼일 없고 앞으로의 여행에 비하면 그 가치가 작아지는 것처럼 나의 일상에도 굳이 생각할 일 없는 것이었다. 라벨도 뜯지 않은 채로 보관(정확히는 짱박아 둔 방치겠지만)했던 차를 바라보고는 이미 휴면계정이 된 클라우드를 오랜만에 풀었다. 1시간 남짓 여행 추억을 보면서 코로나로 올해는 가지 못하는 데에 아쉬움을 조금은 느꼈다. 오랜만에 열어 본 여행보따리는 생각보다 알찼고 즐거웠다. 지난 1년의 나는 이랬구나 싶어 새삼스럽기도 했다. 이럴 때에는 차를 마시면서 봤으면 좋았을텐데 싶었으나, 차를 우리기에는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


 청소가 끝나면 라벨을 뜯어서 차를 한 번 우려먹어야지라며, 부엌에 이미 쓰지 않아 먼지가 잔뜩 쌓인 티팟을 한 번 바라보고는 머쓱해졌다. 이번엔 티팟 쓰고나서 찬장에 넣어놔야지.





 집안 인테리어를 모두 맞추고 이 집에 처음 이사온 그 날처럼 사진을 찰칵 찍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늑하고 예쁜 집이었는데,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간과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침대에 걸터 앉아 철제 선반을 바라보면서 이 집에는 이미 나의 지난 1년이 가득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작년보단 제법 더 나아진 나였음을 새삼스럽게 곱씹으며, 다음 대청소 때에도 많은 것을 마주하기를 조금은 기대했다.



오랜만에 집청소를 하고 조명을 틀어보니, 제법 예쁜 소품들로 꾸밀 수 있는 8평짜리의 집이었구나 싶었다.



 옷장에 새로운 옷이 채워질거고, 책장에도 새로운 책이 채워질 것이다. 비록 올해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어쩌면 국내여행으로 다른 곳에서 사온 어떤 것이 또 찬장을 채울 것이고, 이번 생일선물로 받은 가랜드나 향초는 벽과 선반을 채울 것이다. 만기가 다가오는 내년 4월 즈음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라면서, 향초를 켜고 음악을 잔잔하게 틀었다.


 아주 평온한 토요일 밤, 여느 때보다 더 평온하고 아주 행복하게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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