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알게 된, 지나온 모든 날이 찬란했음을.
끊임없는 불안 속에 심장이 미친 듯이 자주 뛰고, 공황과 불면증에 허덕이다가 다이어리를 열어 내가 속상함을 느끼는 이유,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언가 되게 많을 줄 알았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였다. 그림을 그리는 것. 큰 캔버스에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 한국에 예정치 못하게 머무른 지도 벌써 6개월이다. 이것저것 많은 걸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뭘 했는지 잘 모르겠다. 공허한 마음만 있을 뿐이다. 나의 그림을 그리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며 이 곳 저 곳에서 전시를 하면서 사는 것이 나의 꿈이었는데,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코로나로 알게 되었다.
지나온 모든 날이 찬란했음을.
학교를 들어가고 '빛'(das Licht)이라는 주제로 작업을 하고 있다. 학교 입시를 할 때 마페(Mappe);포트폴리오를 만들 때 여러 가지 테마 중 하나였다.
일명 빛 시리즈.
작업노트:
어둠 속에 빛은 드러난다.
빛은 존재하는 모든 형상의 모습과 성질을 표현한다. 존재들의 독자적인 영역을 결정짓는데 영향을 미칠뿐더러 본질적으로는 그것들끼리의 연결망을 통한 소통과 조화를 이루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간과 시간 속에 빛이 흐르면서 드러나는 사물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바라보는 이의 생각과 관점에 따라 각각 다르게 인식되고 그 의미 또한 달라지기도 한다.
빛과 색. 모든 형상은 빛으로 비추어짐으로써 보여진다.
우리는 각자의 빛 안에서 세계를 인식하고 사물을 바라본다.
남자친구에게 말했다 '나 이번 전시에서는 설치작업을 하고 싶은데 아이디어는 있는데 아직은 이미지가 너무 막연해. 빛과 비닐 같은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어떤 것을 그려내고 싶어.' 그러자 남자친구는 무작정 아무 비닐을 들어 끈을 매달고 거리로 나갔다. 그는 슈퍼 가는 길 내내 끈을 매달은 비닐을 가지고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다녔다. 사진은 그 뒷모습을 찍은.
퍽 아름다웠다.
이런 삶의 장면들이 내 마음에 깊숙히 들어올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림을 그려나간다.
벽에 그 장면을 테이프로 고정한 뒤 대강의 스케치를 한다.
색을 입혀나가며 과정들.
2019년 6월 24일 당일에 시작해서 거의 끝까지 그리고 일주일 정도 쉬었다가 끝냈다.
제목은 2019년 1월의 어느 날.
학교 전시에도 걸었더란다.
그림도 잘 걸려있나 한 바퀴 쓱 돌고 나오려다가 내 그림 앞에 세 사람이 오래도록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따뜻하고 심장이 조금 꿈틀거리는 감정이었다. 그 중 한 분은 내 이름을 찍어가셨다.
한국에서 지낼 수 있는 기간이 고작 한 달뿐이지만, 큰 그림을 그려도 독일에 다시 못 가져가겠지만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내 프로필 소개글을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요, 무너지지 않기 위해 글을 써요.' 라고 썼다. 글을 이따금씩 써 내려가는 이유는, 기억을 머물게 하고 내 마음을 다시 다잡고 붙잡기 위함이다. 그림을 그리는 건 그냥 그게 나라서이다. 이유를 생각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그냥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존재한다. 나로써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한국에서의 내 불안은 그림을 오래동안 그리지 않음에도 있는 것 같다. 생각 끝에 오늘 큰 캔버스와 물감들을 시켰다.
여기에 하루를 머문다 하더라도 나는 그림을 그렸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