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간 속에 놓여있는 삶에는 크고 작은 순간이 있다.
한 달, 6개월, 1년의 긴 뭉텅이가 힘없이 날아가는 먼지의 시간이 될 수도, 단 5분이 내 삶의 커다란 조각으로 자리하기도 한다. 벌써 아침저녁에는 쌀쌀한 공기가 맴돈다. 한 계절이 끝나고 다른 계절이 시작될 무렵의 그 사이 기간, 따뜻함과 쌀쌀함이 하루에 공존한다. 내가 좋아하는 이 계절의 밤에 좋아하는 노래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는 듣고 있다. 나에게 위안과 위로와 사랑을 주는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라는 노래.
나는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다시 앞으로 돌려 재시작 버튼을 누른다. 4분 53초 동안 노래는 흐른다. 흘러가버린 노래를 다시 담고 싶어서, 노래를 들으면서 느꼈던 감정의 상태에 머무르고 싶어 나는 하염없이 재시작 버튼을 누른다.
튼튼하게 잘 짜여진 50호짜리 캔버스가 도착했다. 일주일 정도 그냥 구석 자리에 두다가 포장을 풀었다. 흰 캔버스를 벽에 뉘어놓고 왔다 갔다 하면서 그저 바라보다가 또다시 일주일을 보내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앉았다. 나는 빈 캔버스를 멍하니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무엇을 그릴까 생각하다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했던 순간들을.
내 머릿속의 필름은 끊임없이 뒤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30분 남짓의 기억이었지만 거대한 순간으로 남은 장면에서 멈추었다. 남자친구와 나는 오래동안 장거리 연애를 했다. 우리는 2년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만났는데 늘 그 친구가 내가 살았던 베를린으로 왔었다. 만난 지 세네 달, 나는 정말 갑자기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털어 그 친구가 사는 지역에 비행기를 타고 갔다. 갑작스런 일정에 우리는 아무 계획 없이 동네 이 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다녔다. 그러다 그 친구가 종종 수영을 했던 호수에 데려다줬다. 우리는 호수 주위를 걷다가 아무 준비 없이 강에 뛰어들었다. 무서움과 두려움의 마음이 동할 새도 없이 그렇게 뛰어들었다. 그 친구가 내 앞에서 팔을 잡아주었고 호숫가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바닥에 닿는 것이 사라지자 불안한 발짓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나를 더 꼭 잡아주었다. 강가를 등지고 나를 바라보는 그 친구의 모습 뒤에는 따사로운 해가 비추었고 강물은 바람과 햇살에 반짝이며 일렁거렸다. 불안했던 마음은 아름다운 순간에 뒤덮혀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2,30분 남짓했던 이 마법 같은 순간은 내 삶에 그렇게 거대히 자리했다.
그 순간의 아름다움에 다시 놓여있기 위해, 하루 종일 같은 노래의 재시작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긴 시간의 연애 탓인지 코로나로 생각보다 길어진 장거리 탓인지 잦아지는 투닥거림에 마음이 한껏 지쳐 있기도 하고 앞으로의 미래는 확신할 수 없지만, 무척이나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기억은 내 마음속에 영원히 거대한 조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오늘 하루 종일 들었던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fNrhdZwhj-c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말자
너랑 있을게 이렇게
손 내밀면 내가 잡을게
있을까, 두려울 게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린 서로를 꼭 붙잡고 있으니
너라서 나는 충분해
나를 봐 눈 맞춰줄래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가보자 지금 나랑
도망가자
멀리 안 가도 괜찮을 거야
너와 함께라면 난 다 좋아
너의 맘이 편할 수 있는 곳
그게 어디든지 얘기 해줘
너랑 있을게 이렇게
손 내밀면 내가 잡을게
있을까, 두려울 게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린 서로를 꼭 붙잡고 있으니
가보는 거야 달려도 볼까
어디로든 어떻게든
내가 옆에 있을게 마음껏 울어도 돼
그 다음에
돌아오자 씩씩하게
지쳐도 돼 내가 안아줄게
괜찮아 좀 느려도 천천히 걸어도
나만은 너랑 갈 거야 어디든
당연해 가자 손잡고
사랑해 눈 맞춰줄래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가보자 지금 나랑
도망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