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부터 8개월 후, 나는 이 회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정확히 이 회사에 경력 입사한 지 5년이 되는 셈이다.
심리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복직했을 때,
나는 전혀 다른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교육팀이었다.
판매 매니저들을 대상으로 현장 교육을 기획하고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 언젠가 나이가 차면 하게 될지도 하고 생각했던 교육’이라는 일을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만나게 된 것이다.
‘이건 미리 받는 인생 숙제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새 자리에 앉았다.
휴직 중엔 ‘나는 여기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만두고 싶은 이유는 하나하나 따지자면 여럿이었다.하지만 다시 돌아온 직장에서,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을 마주했다.
교육 시간에 누구보다 진지하게 듣는 판매 매니저들,
한 단어라도 더 전하려 애쓰는 강사님들.
나도 모르게 이상한 보람 같은 걸 느꼈다.
회사 교육이란 걸 이렇게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고민은 여전했다. 입사 초기부터 시작된 애매한 업무 분장은 지금도 나를 따라다닌다. 지난 경력과 맞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은 존중받지 못했다는 이상한 괴로움으로 따라다닌다. 그 문제는 아직도 나에겐 풀리지 않은 숙제이고, 이 숙제를 안고 오래 다닐 자신은 없었다.
1년의 휴직의 결론은 퇴사였지만 1년 더 다니기로 한셈.
‘회복하고 나가자’
하기 싫은 일이라도 주어진 자리에서는 최선을 다하자.
8개월 뒤면 어차피 이 자리를 떠날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누군가의 말에 과하게 반응하지 않기로.
어차피 지금 이 시간도 나중에는 추억이 될 테니까.
에너지를 아끼기로 했다.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영어 열심히 해둬라.”
언제 들어도 식상한 조언.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박혔다.
나는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급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직하고 싶은 회사도 없고, 딱히 하고 싶은 직무도 선명하지 않다. 그런데도 자꾸 마음 한켠에서 이런 생각이 올라온다.
‘영어로 소통할 수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조금은 넓어지지 않을까?’ 어쩌면 더 나이 들기 전에 외국계에서 일해보고 싶은 바람이 아직 남아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혹은 단순히, 세상과의 연결 고리를 하나 더 만들고 싶은 마음일지도.
그래서 마음을 먹었다. 앞으로 8개월 동안, 영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보자. 퇴사를 준비하는 이 시간 동안 영어 실력을 다시 끌어올려 두면, 이직에 대한 에너지가 지금은 높지 않아도 생각지 못한 기회가 눈앞에 찾아올 수도 있겠다는 예감.
기회는 원래 예고 없이 오니까. 그때를 위한 씨앗을 지금 뿌려두자—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건 늘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니까.
이제는 안다.
일은 결국 생계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위에 어떤 의미를 쌓을지는 내 몫이다.
지금은 내가 의미를 부여하려 하기보단,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두기로 했다.
그렇게 오늘도 출근한다.
짧은 영어 문장을 하나 더 외우고,
눈앞의 일에 조용히 집중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