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세 유감
"나는 무엇인가?" 167 - 323 / 제 4부 권태와 인간의 본질적 특성
어떤 사람들이 행인들을 보기 위해 창가에 서 있는데 내가 그곳을 지나간다면 그는 나를 보기 위해 창가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는 유독 나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그 사람의 미모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다, 만약 천연두가 그를 죽이지는 않고 그 사람의 아름다움만을 죽인다면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 테니까.
만약 나의 판단력, 나의 기억력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잃지 않고도 이 특성들은 잃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육체 안에도 정신 안에도 있지 않은 이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 특성들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므로 그것들이 나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특성들에 의하지 않고 어떻게 육체나 정신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한 인간의 영혼의 실체를 추상적으로, 그 안에 있는 특성과는 상관없이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있을 수도 없고 또 옳지도 않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특성만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지위나 직책으로 인해 존경받는 사람들을 경멸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단지 빌려온 특성들로 인해 사랑하므로.
며칠 전에 파스칼의 '팡세'를 함께 읽는 모임에서 위의 구절을 바탕으로 사랑에 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파스칼의 글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타인을 사랑함에 있어서 상대가 지니고 있는 어느 특성에 의해 사랑을 하거나, 혹은 그 특성 만을 사랑한다고 적혀 있기에 그 특성 자체가 사라지면 사랑도 함께 사라진다고 이해하며 이야기가 흘러갔다. 그 대화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대체로 수긍하면서도 어느 한 지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내 딸 혜원이는 나의 '딸' 이라는 특성을 지나고 있지만, 이 특성은 어떻게 해도 사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에 이 세상에도 변하지 않는 특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게 아니냐고 반문을 하며 나는 내 딸 혜원이를 볼 때마다 그 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사랑의 차원을 넘어서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말을 하니 오히려 돌아오는 반응이 더 놀라웠다.
아직 자녀가 없는 싱글이어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대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누구라도 부모 아니면 자녀일테니) 어느 특별한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답변과 함께, 내가 느끼는 신비로움은 DNA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사랑하기로 작정한 것인지를 궁금해 했고, 본인들은 늘 부모의 사랑을 받으려고 남들보다 더 뛰어난 무언가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이야기가 순간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아니 그러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특성이나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그 존재 자체로 온전히 사랑하고, 온전히 사랑받았던 경험이 전혀 없는 건가요? 우리가 비록 신과 같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어서 순수한 사랑을 영속적으로 나눌 수 없다고 해도, 어느 한 순간만이라도 그러한 사랑을 주고받음으로 인한 벅차오름이, 감격이 없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너무 서글프지 않을까요?"
무수히 많은 곳에서 사랑을 이야기하고 늘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럼에도 사랑이 무언지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는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