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뚜벅이 여행!
어제는 일부러 새벽에 깨지 않고 푹 자고 싶어서 [해리포터 - 불의 잔]을 오랜만에 보고 1시에 잤다. 늦게 잠에 들어서 그런지 적절하게 새벽에 안 깨고 7시가 좀 넘은 시각에 일어났다. 약간은 피곤했지만 오늘 가야 할 길이 바쁘기 때문에 씻기 시작했다. 할머니 집의 수돗물은 우리 집만큼 빠르게 온수로 바뀌지 않았다. 그래도 수압이 거의 마사지기 수준이라서 머리 감을 때 아주 시원했다. 오늘 아침 할머니 집밥에는 새로운 국이 나왔다. 소고기 떡국이었는데 진짜 진짜 맛있었다(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갈비탕이었다). 그렇게 아침밥을 맛있게 먹어주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밤늦게까지 돌아다닐 계획이었기 때문에 핫팩 두 개를 준비하고 장갑도 챙겼다.
화명역에서 장산역 방향 지하철을 탔다. 아주 한 번 탔다고 적응이 돼서 그냥 처음부터 이어폰을 끼고 탔다. 이틀 전에 갔던 경로랑은 반대방향의 2호선이었지만 한 번 타봤다고 마음이 편했다. 난 확실히 지하철에선 입석이 편한 것 같다. 지하철 자리는 너무 좁아서 옆 사람이 앉으면 불편하기도 하고... 서서 균형 잡는 것도 재밌다. 지하철이 익숙해질 때가 오겠지, 서울에선.
오늘의 첫 번째 행선지는 보수동 책방골목이다. 원래는 없었던 행선지였는데 어젯밤에 급히 추가했다. 시장에서 너무 시간을 오래 보낼 것 같아서 몇 개 더 끼워 넣었다(최고의 선택이었다!). 책방 골목에서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사려고 일부러 가방에도 최소한의 짐만 넣어왔다. 문득 지하철 문이 열려있는 시간이 궁금해서 재보기로 했다. 정확히 10초 동안 사람이 들어오고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열려있다. 조금 짧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수초등학교 역에 도착해서 보수동 책방골목으로 들어왔다. 뭔가 과거의 느낌이 물씬 나는 동시에 약간의 어수선함도 있었다. 하지만 좋은 글귀들도 많고 책방을 운영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진심 덕분에 좋은 감정이 전달된 공간이었다. 중간에 한 서점에 들러서 슬램덩크 만화책 한 권을 샀다. 이번에 영화로 개봉해서 확장판으로 신간이 나온 것 같았다. 뭔가에 이끌린 듯 한 권을 샀는데 사장님이 너무 고마워하셔서 싸진 않은 값이었지만 나도 기분이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옛날 만화책이나 소설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가볼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오전 일찍 갔기 때문에 반 이상이 열지 않은 서점들이었다. 그래도 볼 건 다 봤다고 생각해서 큰 아쉬움 없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시장에 들어가서 밥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고 영도대교까지도 그리 멀지 않아서 계획에 없던 용두산 공원에 가보기로 했다. 꽤나 언덕에 있었던 용두산 공원을 올라간 뒤 부산타워에 야무지게 수험생 특혜로 반값 할인을 받고 들어가 주었다. 기념품을 받을 수 있는 이벤트도 마련돼 있었는데 인터넷에 퀴즈 정답이 다 나와있어서 그냥 열심히 구경에만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알고 보니 기념품이 차량용 쓰레기봉투여서 너무 실망했다.. ㅠ).
경치 구경을 잘하고 내려와서 고양이를 봤다. 난 원래 동물을 무서워하는 편이라서 길고양이를 만나면 줄곧 피해왔었다. 근데 어디서 용기가 생겼는지 살면서 처음으로 고양이를 만져보았다(지금도 돌이켜보면 무슨 생각이었나 싶긴 하다). 고양이를 만져보는데 이 친구가 빼빼 마른 건지 고양이가 다 이런 건지 뼈가 만져졌지만 온기가 느껴졌다.
사람도 많진 않았고 야경으로 봤다면 더 멋질 것 같았던 부산타워의 전망이었지만 이따 볼 야경이 따로 있어서 국제시장 쪽으로 걸어갔다.
시장은 확실히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여기선 절대 밥을 편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이케아가 절실히 그리워졌다. 너무 북적거리고 정돈이 안돼있어서 그것만으로도 피곤했다. 너무 사람이 많아서 사진조차 찍을 여유가 없었다... 근데 또 시장에 왔는데 다른 곳으로 가서 밥을 먹기엔 아까워서 한 번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시장으로 들어와서 바로 입구에 있는 비교적 한산한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국밥 한 번은 먹어봐야지! 참고로 이것도 인생 첫 국밥이었다. 이번엔 유난히 인생 첫 경험이 많은 것 같다. 하긴 인생 첫 여행이기도 하니까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국밥이 10000원이었다. 분명 예전엔 뜨끈한 가성비 좋은 국밥이라고 5000원대가 있었던 거 같은데 물가 폭등이 새삼 미웠다. 하지만, 국밥을 먹고 왜 사람들이 국밥을 먹는지 알았다. 정말 그 어떤 음식보다 든든했다. 추운 날씨에 다소 미련하게 코트를 입고 간 나도 국밥을 먹고 밖에 나오니 전혀 춥지 않았다. 만족도 최상! 만원에 이 정도면 요즘 식당 중엔 최상급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은 영도대교가 열리는 걸 보러 갔다. 영도대교 가는 길에 biff(부산국제영화제) 거리가 있어서 가로질러가려고 핬다. 그냥 길거리 음식을 파는 포장마차 골목이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비둘기와 장사하시는 포장마차 상인분들. 딱히 배고픈 상태도 아니었고 현금도 없어서 그냥 구경만 하고 영도대교로 향했다.
난 당연히 다리가 열리는 그저 그런 행사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장급 인파였다. 그래도 난 20여분 전부터 자리를 잘 잡고 영상 찍을 준비를 했다. 영도대교 오픈. 꽤 높이 올라갔다. 겨울날 내 손을 10여분 동안 희생해서 타임랩스로 찍어두었다!
그리곤 영도대교를 걸어 올라가서 깡깡이예술마을로 바로 갔다. 깡깡이 예술마을은 선박 관련 일을 하는 공장? 일터가 모여있는 곳이다. 그런데 많은 예술가들이 벽화도 그리고 해서 예술마을로 발전했다. 깡깡이라는 이름은 배를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처음에 계획할 땐 예술마을이라는 이름에 끌려서 일정에 넣었다. 막상 가보니 분위기가 정말 남달랐다. 도시에선 느끼기 힘든 고요함과 정말 이름답게 깡깡거리 거나 뭘 깎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것도 파도소리랑 같이. 굉장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느낌이었다. 추운 날에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 아이러니하게 보였다. 북적대는 걸 싫어하는 나에겐 참 괜찮은 공간이었다. 쇠냄새와 왠지 모르게 쓴 냄새. 몸에 좋은 냄새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런대로 나에겐 만족감을 주는 냄새였다.
다음 행선지인 흰여울문화마을로 걸어가는 길에 꽈배기 집이 있었다. 처음엔 지나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못 참겠어서 그냥 들렀다. 꽈배기 3개랑 핫도그 1개를 먹었다 전부 찹쌀로 만든 거였다. 갓 만든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맛있었다. 처음으로 부산에서 사 먹는 간식이었다. 진짜 미소 지으면서 먹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는데 손이 너무 시려서 결국 추위에 굴복하고 장갑을 착용했다. 장갑을 끼면 휴대폰을 수시로 확인하기엔 불편했지만 훨씬 손가락이 편안해질 수 있었다...
흰여울문화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선 절영도 해안선을 띠리 걸어야 했다. 생각보다 너무 좋은 산책로였다. 근데 흰여울 문화마을은 밑 쪽이 태풍복구작업 중이었다. 그래서 위쪽만 둘러봤는데 그래도 명색이 문화마을이라 그런지 날 실망시키진 않았다. 그래도, 커플이 너무 많이 보여서 약간 불편해지긴 했지만 나도 사전 답사 차 왔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느끼고 둘러보았다.
이때쯤 이미 2만보를 넘긴 상태였는데 중리노을전망대까지 2킬로 거리였다. 버스를 타고 가기엔 애매하다고 생각해서 그냥 쭉 걸었다. 생각보다 길었지만 노래와 함께 가서 그리 길진 않았다. 가는 길이 차도밖에 없어서 길가로 조심조심 갔는데 아마 차들이 날 신기하게 생각했을 것 같다. 중리노을전망대는 막상 갔더니 별로 볼 게 없었다. 그래서 근처 바다에서 파도와 지는 해를 담을 타임랩스를 찍으며 20분 정도 멍 때리고 제시간에 맞게 마지막 코스인 청학배수지 전망대를 찾아갔다.
어느 정도 잘 나온 야경 같지만.. 이 야경은 사실 많은 아쉬움과 한이 서려있는 풍경이다. 청학배수지 전망대에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어가며 거의 한 시간 가까이를 기다렸다. 그 이유는 부산항대교가 점등하는 걸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7시가 다 되어 가도록 불이 절대 켜지지 않았다. 정확한 시간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었지만 11월에 6시 45분에 켜졌다고 해서 참을성 있게 칼바람 맞으며 기다렸는데..... 안 켜졌다. 그래서 그냥 그런대로 최대한 열심히 찍었다. 내가 1시간 기다릴 동안 약 5쌍의 커플이 왔다 갔다. 청학 배수지 전망대 문지기를 자처한 수준이었다.
얼어버린 몸을 이끌고 지하철역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할머니 집 근처에서 와플을 먹으러 갈 생각에 들떠있었다(몇 달 동안 계속 와플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랬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지하철에서 도를 아십니까를 만났다. 내가 외지인처럼 보였나 보다. 처음에 말 걸 때부터 바로 알아차려서 몇 번 호응해 드리고 죄송하지만 사리분별을 할 줄 알아서요.. 하고 공손하게 도망쳐 나왔다.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 같아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화명역에 도착해서 와플을 사들고 할머니집으로 들어가서 해리포터를 보며 행복하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최종 걸음수: 31286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