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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Jan 04. 2024

여기, 이 정원으로 널 초대해!

"Bring Your Own Self"

어릴 적 내 상상 속 할머니란 이런 모습이었다:


* 손녀들에게 재밌거나 무서운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준다.

* 정원에서 자기만의 꽃밭을 꾸미거나 따뜻하고 맛 좋은 수프를 언제든 끓여준다.

* 쿨하고 자유로우며, 꼰대스러운 조언은 삼간다.

* 돈 좀 벌 줄 아는 패피.


어릴 적부터 읽었던 이야기나 삶의 소망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낸 하나의 환상적 이미지. 글을 쓰기 시작하고부터는 박완서, 마거릿 애트우드, 비비언 고닉. '이런 사람들이 글을 쓰는 거구나' 싶다가도 '저 나이쯤 저런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며 닮고 싶은 미래의 할머니들도 생겨났다.



내가 원하던 할머니, 그냥 내가 되자.



퓨쳐 셀프의 네 번째 위협은 미래의 나와 단절되는 것이다. 하루를 어떻게 써야 멋쟁이 할머니와 만날 수 있을까? 그러고보니, 멋진 할머니란 뭘까? 다시 생각하게 된다. 표정, 말투, 식성, 아침 기상시간, 돈 씀씀이, 활기, 업무 능력, 재테크 실력, 하모니카 연주 실력, 마음 씀씀이, 살고 있는 집, 수입 등등.


5년이든, 10년이든, 20년이든 미래의 나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현실과 동떨어져 어색하다. 우리는 수렵, 채집으로 먹고 살던 시절부터 당장 지금 먹고사는 문제에 신경쓰도록 진화되어 왔다. 장기적인 미래? 솔직히 다른 사람의 일처럼 느껴진다.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일은 옳은 방향이지만, 애쓰며 역행하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색하고 이질적인 것. 그렇구나, 차라리 나를 귀한 타인으로 대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마음 쓰고 관심 갖는 타인에게는 투자하며 관찰하게 되니까. 그런 '타인'을 위해 나는 배우고, 건강하게 살고, 소중한 관계를 지키면서 명품백보다 더 가치있는 삶을 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관점으로 넘어가기 전, 조금 당황스러운 사실에 직면해야했다.



이전 글에서 언급되었던 위협, 과거에 대한 서사.


미래나에 대해 오래 생각하다 과거의 나와 다시 만났다. 작년의 나를 바라보며, 오래 전의 수치심은 극복했지만 짠함이 밀려왔다. 잠시 가라앉았다가 다시 올라오는 감정들. 애 쓰는 아이. 가끔 울긴 해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는 아이. 휘어지긴 해도 꺾이진 않는 아이. 그 아이가 울고 있었다. 공적인 일들이 차고 넘쳐도 사적인 삶을 대충 살지 않는 마음에 피해의식과 번아웃, 분노가 가득했다. 한 해를 보낸 나에게는 막연한 휴식보다는 '알아차림'이 필요했던 것 아닐까?


과거의 나를 깊이 마주하고나, 미래의 나와는 한결 자연스럽게 대면한다. 가까워진 미래는 이전보다 더 나와 닮았다. 여인초를 키우는 마음으로 나를 본다. 어느새 돋아난 새싹 하나에도 희망을 감지하고, 매일 이른 아침마다 미션 레터를 보내는 마음을 나에게도 보낸다면 미래의 나는 단단하고 편안해질 것이다.


아둥바둥 잘 살려고 애쓰거나, 구태여 본능에 역행하는 정신이 아니더라도, 내가 끊임없이 소환하는 미래의 나는 잘 살 것이다. 괜찮은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마음엔 정원이 하나씩 필요하다. 스스로 가꾸며 쉬어가다 다른 누군가도 들어와 쉬어가게 하는 정원.



아이들이 '먼' 미래가 생각보다 멀지 않다는 걸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래를 생생하게 그려나가도록 '미래로부터 온 편지' 미션을 준비했다.





2026년 신입생이 된 내가 보낸 편지를 구체적으로 작성해봅시다. 단순한 응원이나 격려로 끝내지 말고, 좀 더 가보자구요. 그 때 입고 있는 옷과 그 날 들은 수업, 하루 일정, 날씨, 만나는 사람들 등등 더 생생하게요.










다음은 작년 말에 쓴 미래 일기 전문. 미래 편지를 써 놓으면 오늘의 내가 과거와 미래를 잇는 메신저가 된 느낌이다. '둘이 잘 지내봐' 하는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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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당신의 5년 후 미래에서 왔습니다.


    아침에 계란 2개와 통밀 베이글 반 쪽을 먹은지 5년이 되어가요. 저녁엔 샐러드를 먹지만 여전히 빵의 유혹엔 무사하지 못해요. 아, 5시 반에 일어나 모닝페이지를 갈겨 쓰던 게 엊그제같은데, 새벽 5시에 일어나야지 억지로 다짐해도 안 되던 때도 있었는데 요새는 새벽 4시면 눈이 번쩍 떠져요. 잘 써지는 날은 다섯 페이지도 척척 써요. 이러다 책 내겠네. (아, 미래일기지 참.) 이쯤되면 한 권은 냈겠죠. 아주 오래 전에 냈던 역서들은 제목도 고리타분하고 필력도 허술해서 참 아쉽단 말이죠.


    짝꿍과 저는 5년 전 여름 2주 동안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프랑스 파리, 그리고 터키의 이스탄불을 여행했는데요. 그때 바르셀로나에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여기와서 살고 있다니. 직장을 그만두고 출퇴근 없이 살고 싶어서 떠났는데 여전히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지금은 영-중-한 번역일을 하면서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탱고와 스페인어를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답니다.


    넉넉하게 벌고 있진 않지만, 강의와 번역 제안이 끊이지 않아요. 틈틈이 원서 독서모임도 진행하고 있어요. 5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이에요. 말솜씨도 글빨도 없었던 시절,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몰랐던 그때는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쓰고 싶은 글만 쓰던 시절이었어요. 마침 바르셀로나로 출장을 온 제자에게서 연락이 왔요.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평소에 아끼던 화이트 와인과 뚜론을 잔뜩 챙겨줬죠.


    나*키 바르셀로나점에서 산 신상 인빈서블을 신고 아주 날아 다녀요. 가로수 사이에 놓인 벤치에 앉아 이야기에 빠진 사람들, 노천 카페에 죽치고 앉아 여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을 지나 한참을 달리다보면 마음이 벅차 오릅니다. (숨이 가빠서 그럴 수도 있어요.) 하루키가 출근도, 육아도 하지 않고 한가롭게 러닝이나 하고 글을 쓴 이유를 알겠습니다. 아이디어가 샘솟거든요. 저도 그럼 그간에 얻은 아이디어와 인사이트를 기록하러 이만 떠나보겠습니다. 부디 무탈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미래에서 다시 만나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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