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테크 서적 3단 쌓기 해프닝 이후, 좀 떨떠름했지만 선물이 될지 폭탄이 될지 모를 13월은 우리를 다시 테이블로 불러 모았다.
"요즘 <Be Your Future Self Now> 읽다 보니까 현재랑 미래에 대해서 자주 오래 생각하게 되는 거 같아."
운을 떼 본다.
"우와, 대다나당."
맨날 비슷한 리액션이지만, 절대 영혼 없는 남자는 아니다. 경청에 유능한 짝꿍은 일전에 고부갈등으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이해 가능과 이해 불가를 오가는 내 얘기를 100분 토론 진행자처럼 진득이 앉아 끝까지 들어준 상당한 내공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결혼하고 3년 가까이 재테크 책이란 책은 다 쌓아두고 읽는 내내 그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세액공제 챙기기는 물론 기본적인 경제관념이 탄탄해서 대금 결제일도 월급날 전으로 맞춰놓을 정도로 신용카드를 체크카드처럼 쓰는 사람이었고, 아낄 땐 아끼고 쓸 땐 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저 배운 것을 늘어놓는 것에서부터 공감을 바라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그의 반응은 '그걸 해봤자 뭐 해?'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식이었다. 물론 말로는 그의 사회적 공감능력이 최대치로 발현된 상태였지만, 표정과 말의 온도차에 김이 빠지곤 했다.
그런데 엊그제부터 슬슬 기미를 보이더니 어젯밤엔 급기야 어디서 자극을 받아 왔는지 낯설 정도로 결의에 차 있었다.
"내가 그 선생님 옆 자리에 앉은 건 행운인 거 같아! 그 선생님이 주식 관련해서 이것저것 많이 알려줬거든."
'서운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내가 그렇게 몇 년을 얘기해도 관심 없더니, 이제 와서 그 사람 덕분이라고? 행운이라고?"
주식이 -90%로 폭락한 사람처럼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왜 서운했는지.... 주저리주저리...*너무 사적인 내용이라 생략*)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제 할 얘기는 다 했으니 정리한다는 투로 말했다.
"어쨌든 나는 이건 혼자 할 일은 아닌 거 같아. 같이 바라봐야 할 목표고, 멀리 오래 봐야 하는 일이면 우린 투자 파트너, 스터디 파트너야!"
그는 한참 동안 말없이 생각해 잠기더니 뭔가 크게 결심한 것 같았다. 그 후 30분 정도 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긴장이 풀리면서생각 없이 집어먹었던 아몬드의 텁텁함이 그제야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술 한 잔 할래?"
추적추적 비 내리는 날인데도 둘 다 망설임 없이 집을 나섰다. 안을 꽉 채우던 게 터져서 시원하면서도 나른하고 가라앉는 느낌이 들어 찬바람에 날려버리고 싶었다. 우린 철부지 소꿉친구들처럼 맘에 드는 치킨집을 찾아 자리를 잡고는 우울증 같았던 분위기는 모두 잊은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새로 친구를 만든 사람과 새로운 희망을 찾은 사람처럼.
"그나저나 자긴 어쩌다 고전 소설을 전공하게 된 거야? 현대소설이 훨씬 재밌고 세련되지 않아?"
"현대소설은 설명하려다 보면 서양철학까지 넘어가잖아."
"고전소설은 동양철학 안 해? 마찬가지 아니야?"
"난 동양철학 쪽이 나아."
문학 취향마저 다르다. 그도 현대소설이 세련된 구성에 재미도 더 있는 것은 인정했지만, 근본을 좋아하는 성향이며 비교적 딱 떨어지게 설명해 낼 수 있고 현대 소설의 Novel보다는 고전 소설의 Romance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여기서 Romance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 이야기보다 더 큰 이야기라고.
이야기에 열을 올리다 보니 재테크에서 전공, 그리고 살아온 인생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닭다리 하나 남았네. 자기 먹어."
"아니, 나 배불러. 자기가 먹어." 대화 전에 스트레스받는지도 모르고 꾸역꾸역 먹은 갈비살이 아직 뱃속에 가득했다.
"오래 살다 보니 닭다리를 두 개 다 먹는 날이 오는구나."
"눈치 없이 혼자 닭다리를 두 개 먹던 날이 있었지. 그땐 나 진짜 몰라서 그런 거야. 진짜야!"
그러고 보니 참 다채롭게 서운하다, 우린.
"자기야, 나 퓨쳐 셀프 오늘 읽은 부분이 (우선순위 정한 것에 전념하도록) 자동화, 시스템화하라는 내용인데,
네이버페이 증권 들어가는 루틴 만들어 볼까? 맨날 공부만 하고 말로만 하고 안 들어가... 내 생각엔 겁이 좀 나나 봐. 내가 어디 가서 의지로 지는 사람은 아닌데.."
"그래요. 난 아까 자기가 오늘자 재테크 챌린지 내용 보내줘서 생각해 봤어."
"뭔데 뭔데?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
"응. 여유와 자유를 찾는 거. 돈, 시간, 목적, 관계... 다."
"그러게. 일할 때 여유는 통장에서 나온다잖아."
'없다고' 느끼는 불안감이 '있어서' 소비가 끝이 없다. 옷장의 패딩은 새로 안 바꿔도 살지만, 퇴근 후 맥주나 로제 떡볶이를 참는 건 돈을 덜 쓰는 것 이상의 감정 참기니까. 어떤 날은 리더십이 지나쳐 외롭기도 하고, 열정이 자부심이 아니라 열정 페이로 느껴져 헛헛하기도 하고.
"오늘 문득 그런 생각 들더라. 내가 30대의 분노, 아니 어쩌면 10대 후반부터 쌓아온 20년 치 분을 가엾은 돈에게 풀고 있었던 건 아닐까. 엄마, 아빠가 하나하나 챙겨준 경제관념들을 소화하지 못하고 체기가 생겨 얹힌 그대로 살아온 건 아닐까 하고."
즐겁게 나이 들고 싶어. 나이 들어서 슬프고, 늙어서 죽는 게 아니라 나이 들수록 쌓이는 기쁨이 있고, 살아낸 하루들이 있어서 죽는 때가 오는 거라고 믿고 싶어.
툭하면 열심히 하는 근로 근손실은 좀 와도 되는 거 아닌가. 유독 일 끝나면 맥주가 미친 듯이 당기고, 보기 싫은 사람들 때문에 얼굴에 피가 쏠리도록 미치겠는 일이 없는 거. 내가 글 쓰는 일이 출근하거나 수업 가거나 자율학습 감독하는 일로 끊기지 않는 거. 멘토멘티 활동의 기쁨만으로도 직업만족도가 높아지는 거.
그 별 거 아닌 게 참 별 거더라.
돈 얘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돈과 관련된 것들도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현재, 미래,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심리, 출산율, 미국과의 시차... 나 자신까지. 퓨쳐 셀프를 얘기하다 퓨쳐 셀프가 결국 '현재의 나'임을 깨닫는 것처럼, 동그란 세계였다.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가면 결국 다 만나게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