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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Feb 02. 2024

수필 인간(隨筆人間)

수필 인간에게 특별한 조예나 실력은 필요 없다. 삶그냥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사는 없고, 동사만 있다. 다만, 수필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하루치 마음이다. 딱 하루치면 된다.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 : 하루를 열심히 일하면 천하에 극복 못할 일이 없다  



하루를 일구는 마음에 대단한 목표나 평가가 있을 리 없지 않나. 무엇에 열심할 것인지에 집중할 뿐. 그리고는 그 열심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사랑이 되고, 그래서 다시 삶 자체로 사라지기까지.


닥치고 현생을 사는 것이다.


밀가루와 설탕 없는 몸으로 살기 위해 옛사랑 탄수화물 목록을 작성한다.


베이글

소금빵

무화과크림치즈빵

프레즐

로제떡볶이

까르보나라

포테토칩

버터쿠키


매일 끊고 매일 다시 시작하는 목록. 당과 이별하고 이젠 좀 당당하게 살고 싶은데, 우리의 지난 연애는 너무 꾸덕꾸덕해서 떼놓으면 더 불타오른다. 젠장. 이 목록을 작성하는 동안 르뱅 쿠키를 추가했지만 괜찮다. 방금 전까지 배달 버튼을 누를 뻔했지만 괜찮다. 결국 냉동실에 있는 호밀 식빵을 두 쪽 구워 먹었지만 괜찮다.




말이란 기만적입니다. 기본적으로 정직할 수 없어요. 말은 앞서 나가거나 뒤처지거나, 과장하거나 숨깁니다. 누군가를 드러내는 것은 행동이죠. 그래서 언행일치가 어렵다고 하는 거고요. 일상에서나 글에서나, 어떤 인물의 본심은 언제나 행동에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입이 아니라 몸입니다. <중급 한국어> 107-108      



최근 아주 짧은 소설을 쓰면서 글이 쓰는 사람을 아주 멀리 떠날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아주 먼 나라의 오래전 이야기를 들었을지라도 그건 내게 오면 결국 나의 이야기가 되었으므로. 더불어, 글이 내 몸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툭하면 붉어지는 볼, 충혈된 눈, 간지러운 몸, 붓는 다리. 불면, 기묘, 울분 같은 것들.




전에 우리가 서사의 기본 구조에 관해 이야기한 적 있었죠? 갔다가 오는 것이 모든 이야기의 기본이라고요. A가 일상에서 비일상의 세계로 넘어갔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A'가 되는 것이 여행과 이야기의 구조라고 했었어요. <중급 한국어>, 142




1. 나 혼자만 일을 다 마치지 못한 건 아닐까?

2.  다들 잠든 시간에 일어나 읽고 쓴 노력들이 모두 허사가 되는 건 아닐까?



A에서 비일상으로 갔다가 다시 A'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야기(우리는 이것을 비극이라고 부른다)를 상상해 버렸다면 더 극적인 비일상으로 갔다가 더 힘차게 A'로 돌아오는 힘이 있다고 과신한 건 아닐까? 맵찔이가 자꾸 부상맛에서 그칠 줄 모르고 혼수상태맛과 사망맛을 고르는 것과 같다. 


심장은 다리를 움직여야 뛰고, 마음의 배터리는 펜을 따라가야 채워진다. 생존을 위해 비교를 멈추지 않는 인간은 구태여 나보다 잘난 인간을 찾아내 스스로를 살리려는 명목으로 죽인다. A는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난다. 가끔은 A'가 되지 못한 이야기도 털어놓으면서 진실된 허구부활을 꿈꾸는 수필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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