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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Feb 03. 2024

'나의 오늘' 저널

I write what happened to me. That's all.

내가 오늘 본 드라마: 정신 병에도 아침이 와요

드라마를 정주행 한다는 건 아주 단단히 꽂혔다는 뜻이다. 영화는 봐도 드라마는 잘 안 보는데 <멜로 체질>, <나의 해방 일지> 이후 몹시 몰입해서 본 작품.


정신 병동엔 사연도 많다. '다 잘 되라고' 키우는 엄마의 양육과 교육에도 제대로 크지 못한 40대 딸, 좌절과 희망 고문 뿐인 고시 생활에 지쳐 게임 월드에 빠진 청년,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이스피싱으로 힘들게 모은 전재산 마저 빼앗긴 20대 여자, 조현병, 조증, 가스라이팅 등등.


의사나 간호사들도 이런 사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간호사들은 치열한 간호 생활에 치여 자신들이 잃은 삶을 눈치채지 못하고 살아가다 탈이 난다. 남편과 아이로부터, 엄마로부터, 자기 자신의 무심함으로부터 빼앗긴 시간들을 하나씩 되찾아간다. 치료하며 치유된다.




이 드라마에서 정신병동은 간호하는 자와 간호받는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공간이다. 간호사인 주인공과 그의 죽마고우, 그의 의사 남자 친구까지 각각 우울증, 공황장애, 강박장애를 겪는다. 정신 건강이 위협받을 있는 '경계인'으로 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족위해서 정신 병력을 가진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일은 나에게는 그런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을 라는 확신과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공황 장애, 강박 장애, 게임 중독, 경계성 성격장애, 조울증, 우울증 등의 증상을 당사자의 입장에서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생생한 시각 효과로 구현하면서 공감과 이해라는 불가능의 영역에 살짝 발을 디딘다. 의사, 간호사, 환자의 경계란 사실 우리가 정해놓은 것이며 모두 조금씩 극복하면서 살 뿐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뉴스 기사 자극적인 보도에선 보이지 않는 사연과 고통들 생생하게 전달하는 이야기가 좋았다. 따뜻하고 귀엽고, 가끔 웃기다 자주 울리는 이야기.





내가 오늘 산 것: 안경

"자기 시력이 좀 떨어진 거 같던데 밤운전할 때만이라도 안경을 좀 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면허증 갱신을 하러 갔다가 내가 시력검사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됐다.

"고객님, 안경 쓰셔야 돼요."

"네? 저 운전하는데 아무 문제없는데요?"

"그건 적응이 되어서 그런 거죠. 꼭 안경 쓰세요."


라식을 한 지 10여 년이 흘렀다. 빛 번짐은 있었지만 그런대로 시력이 떨어지진 않았었는데 건강검진을 하면서 유독 내키지 않는 게 시력 검사였다. 어쩌면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시력이 예전 같진 않다는 걸.


"난 흐릿한 게 좋은데? 별로 선명하게 보고 싶지 않아. 이대로도 좋아."

"그게 무슨 소리야?"


"저 시력이 그렇게 많이 떨어진 건 아니죠? 막 압축 엄청해야 되고 그런 거 아니죠?"

"아, 네 지금 시력이면 운전할 때 거의 불편함은 없으실 거예요."


아주 오랜만에 안경을 다시 끼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흐릿하게 보고 싶었던 건 눈앞의 세상이 아니라 여드름 흉터와 붉은기가 드러나는 내 얼굴이었다는 걸. 나만의 필름이 상영되는 영화관을 빠져나오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눈앞의 세상은 또렷이 보고 나는 흐릿하게 보는 것. 그건 행복에 가까워지는 일 아닐까. 나에게서 조금씩 거리는 두는 일은 매일의 과제. 약간의 흐릿함은 무해하다는 생각.



내가 오늘 만난 사람: 만나온 사람들과 또 만날 테니

인정욕구는 내 삶에 얼마나 영향을 치고 있을까? 어떤 말에 혹하고 어떤 선택에 괴로워하는 걸까. 책 <영업의 신>에서는 영업의 비밀로 '인정 욕구'를 언급했는데 한 개인에여러 사회적 역할들이 주어지므로 인정 욕구에도 상당히 취약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됐다.


인정받기 위해 돈, 시간, 에너지를 쓰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존중을 잃기 쉽다. 인정 욕구란 대체로 자기 자신보다는 특정 혹은 불특정 다수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고 인지하기 어렵다. 인지하는 순간 세상이 나의 인정 욕구를 끝없이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인정을 반만 내려놓고 존중을 챙길 용기를 내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 책 <미움받을 용기>가 아직까지 읽히는 이유 아닐까.


하지만 올해는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에 NO라고 세 번 연이어 거절하고 평안을 찾았으므로 인정을 반 덜어내고 존중을 채우기 시작했다고 느낀다. 무조건적이고 무례한 거절은 관계를 끊어놓지만 이유가 분명한 완곡한 거절은 오래 볼 관계를 위한 끊기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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