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좌절과 자괴감에 휩싸였다. 매일 쓰고 있지만 이미 써놓은 것과의 거리감, 이미 쓴 것들과 다시 써 내려가야 할 것들 사이의 아득함을 느꼈다. 노트에 뭔가 생각나는 대로 쓰고 나면 맑아졌다가 이내 다시 몽롱해졌다. 글쓰기의 효용에 감탄하다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다.
일전에 읽었던 책 <뒤라스의 말>이 떠올랐다. 책장 위에서 두 번째 칸에 <한나 아렌트의 말>과 나란히 꽂혀 있었다. 사실 마르그리트 뒤라스를 실제로 만난다면 그의 아우라에 정신이 얼얼해질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그런 얼얼함이 필요했다. 그 아래 칸에는 사다 놓고 아직 읽지 못했던 책<물질적 삶>도 있었다.
글을 쓸 때 작용하는 본능 같은 것이 있다. 쓰게 될 것은 어둠 속에 이미 있다. 쓰기는 우리 바깥에, 시제들이 뒤섞인 상태로 있다. 쓰다와 썼다 사이, 썼다와 또 써야 한다 사이. 어떤 상태인지 알다와 모르다 사이. 완전한 의미에서 출발하기, 의미에 잠기기와 무의미까지 다가가기 사이.
"뭔가를 많이 하고 있긴 해."
짝꿍은 내게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뒤라스가 말하는 여성들과는 달리 나는 육아를 하지도, 집안일에 능숙하지도 않다. 짝꿍은 나보다 요리도, 집안 정리도 훨씬 뛰어나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른 글에서 더 풀어봐야겠다.) 각자가 잘하는 것을 더 잘하기로 했는데 내 쪽에선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도저히 생색이 나지 않는 것투성이다. 어째서 매일 이렇게 분주한 걸까.
책과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핵심적인 건, 지우기예요. 적게 촬영하기, 꼭 필요한 것 외엔 아무것도 담지 말기. 관객에게 시각적으로는 최소한의 것을 제공하면서 보다 많은 것을 이해하게 하기, 듣게 하기.
분명 내 삶에서 꼭 필요한 것만 하고 있는데 왜 다시 꽉 채워진 걸까? 최소한의 것만 가르치고 많은 것을 이해하게 도와야 하는 것은 아이들 뿐 아니라 나 자신이기도 했다. 듣게 하기. 누군가에게 대단히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은 심각한 착각이다. 중증에 가깝다. 우리의 음색과 톤으로 그들의 귀를 사로잡기. 나긋나긋하지만 힘 있고, 센 듯 하지만 따뜻하고, 별 일을 하지 않지만 결국 모든 일을 해내는.
어떤 모델도 따르지 말고 자기의 길을 찾으라고요. 자신의 공포를 위장하는 데나 쓰일 뿐인 어떤 레퍼런스도 따르지 말라고요.
"롤모델이 누구야?"
"그런 게 꼭 있어야 돼요?"
오래전 대화의 충격을 다시 되새긴다. 어떤 모델도 따르지 말고 나의 길을 찾을 것. 뻔하게 곧이곧대로 살지 말 것. 내 속은 조용하지도 않고 생활이 심심하지도 않으나 이대로도 괜찮다고. 누군가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내 방식대로 살자고 다짐하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