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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Mar 12. 2024

연극배우의 공간감각적 생활


입꼬리를 있는 힘껏 끌어올린다. 가끔은 달뜬 마음이 축 쳐진 몸을 끌고 가주기도 한다. 그런 날은 입꼬리, 기운, 신체가 각기 다른 자아 같다. 무엇이 올라가든 떠올라야 살아갈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수업 종이 울리고 교실까지 행진을 시작할 때 자각하는 나의 상태는 언제나 수업의 질로 그대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건 내가 수업에 거는 일말의 희망 같은 것이다. 아이들과 나와 공간은 생물로서 상호작용한다. 어떤 날 자지러지게 웃으며 함께 떠오르지만 어떤 날엔 모두 전멸.




언제든 수업을 하러 강의실에 들어가면 먼저는 그 일을 하라고 위그가 말했다. 가만히 서서 공간을 감각하는 일. 이제 곧 이야기가 번질, 나의 목소리가 울려 나올 그곳. 이때 공간을 감각한다는 것은 그 공간 속에 존재하는 나를 잊지 않는 일이다. '내가 여기 있어.' 그것을 느끼는 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그러나 존재는 몸이라는 물성을 입고 있기에 단지 바라봄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가 있다. 하여 다음으로 우리가 한 일은 공간 속을 걸어보는 일이었다. 천천히 두리번거리며.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눈으로 인사하면서. 아무와도 부딪치지 않는 채로. 각자가 바닥에 그리던 보이지 않는 곡선들. 편재하는 공간을 몸으로 익히는 동안 다시 그 속에서 무수히 발생하던 새로운 공간들의 결. 특별히 재밌었던 건 보편성과 특수성에 관한 연습을 한 일이었다. 강단에 선 상황에서는 저 둘을 잘 조율하는 능력이 필요할 거라고 위그가 말했다. 한두 사람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 청중을 존중하며 모두에게 발화하되, 판단에 따라 어떤 순간에는 특정 지점에 눈길을 돌려 주위를 환기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특수로부터 빠져나와 다시 보편으로 돌아가고, 보편을 보는 사이 포착된 특수를 제때 주목할 수 있는, 일종의 유희를 원활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러기 위해 무엇을 훈련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저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나의 이야기에 함몰되지 않고 공간 전반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통상적으로 우리가 정신의 일이라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몸과 연관돼 있고, 몸의 일에 있어 단련이 불가한 지점은 퍽 드물다.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10년 차가 되니, 반에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고등학교 시절 악몽을 떠올리며 지나치게 몰입하는 경향도 한풀 꺾였다. 나는 이제야 교사가 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는 헛된 생각은 옅어졌고, 좋은 언니 정도는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더 흘러버리기 전에 연을 맺은 아이들과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고 느낀다. 하루하루가 아깝다.



하루를 보내며 아이들에게서 인간의 30523046842가지 모습을 본다. 순수하고 당차고 이기적이고 영악하고 서늘하고 게으르고 부산하고 의뭉스럽고 다정하고 귀엽고 지독하고 웃기고 답답하고 착하고 안쓰럽고 기특하고 그리고 또 어떤 모습이 나올지 몰라 두렵기도 하지만 엉뚱하고 사랑스럽기도 하다. 무대 위의 등장인물은 꽤 입체적이고 하루에도 수없이 오르락내리락 울그락불그락한다.



아무도 내게 교실에 들어가라고만 했지, 혹은 나 대신 들어가 달라고 했지, '수업에 들어가면 이렇게 해보세요.'라고 가르쳐 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조언을 해주었더라도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교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서 그 공간을 바라보라고 말해줄 사람은 영영 없지 않을까.



나는 이제 조금씩 그 덩그러니를 자각하고 연습한다. 소리 없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하지만 누군가에겐 들키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가끔 기분이 좋을 땐 교실에 가는 복도에서 무딘 몸을 영화 <싱잉   레인>의 주인공처럼 뻗어보곤 한다. 그 기분이 얼마 가진 못할 때도 있지만 어쩌면 끊임없이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교단에 서면서 늘어가는 건, 내향적 성향 탓에 한 두 명의 눈만 빤히 쳐다보던 내가 돌아보는 눈동자가 늘어간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용기를 얻게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한 명에게 얘기하는 듯하다 모두에게 시선을, 보편적인 얘기를 하다가 누군가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보는 일. 매일 실험하듯 해본다. 이 실험은 하루 일과 중 가장 큰 보람을 안겨준다.

 


예전부터 '웃겨주기'에 대한 강박이 있는데, 아무도 지운 적 없는 의무감이 점점 커진다. 심각하고 진지한 주제를 이야기하다 한 번쯤은 공감과 유머를 얻어보려는 나의 몸부림은 가끔 처절하고 외롭다.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일은 어쩌면 그런 시간들에 익숙해지기 위한 단련에 가깝다. 나는 누군가가 갖추기를 바라는 모습을 아침에 미리 갖추고 출근해 그들 곁에 말없이 있어주고 싶기도 하고, 적게 말하면서도 오래 기억되고 싶기도 하다.



쓰고 보니, 욕심 같다. 그저 무사 퇴근이 감사한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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