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자는 루카스. 익명의 쌍둥이 '우리' 중 하나는 국경을 넘었고 루카스는 이 도시에 남겨졌다. 시점은 이전보다 더 멀어진 3인칭. 전쟁은 끝났고 엄마, 아빠, 할머니까지 모두 잃었으며 하나 남은 쌍둥이 형제마저 헤어졌다. 낯익은 거리, 소란스러웠던 술집 모두 예전 같지 않다.
클라우스는 어디로 갔을까?
루카스가 말했다.
"제가 그간 오지 않았던 건 신부님의 돈 때문이 아니었어요. 차라리 그런 이유였다면 좋겠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루카스가 고개를 숙였다.
"저는 신부님을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뿐만 아니라 제 채소밭도, 장날도, 우유도, 치즈도, 심지어는 먹는 것도 잊었어요. 몇 달 동안 저는 다락방에서 잠을 잤거든요. 제 방에 들어가기가 두려웠어요. 오늘 레오니의 조카인 소녀가 와서 겨우 용기를 내서 그 방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 소녀의 얘기를 듣고서야 신부님에 대한 저의 의무가 생각났어요."
"자네는 내게 아무런 의무도 없네, 아무 책임도 없어. 자네는 자네 물건들을 팔아서 그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내가 지불 능력이 없으면, 자네는 내게 아무것도 공급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다시 말씀드리지만, 절대로 돈 때문이 아니었어요. 이해해 주세요."
"설명해 보게, 듣고 싶네."
"저는 이제 더 이상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는 일상을 기억하지 못한다. 장날을 몇 주째 깜빡하고 신부님을 언제부터 찾아가지 않았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저녁마다 신부와 식사를 같이 하고, 체스를 두고, 산책을 하면서 일상을 회복해 나간다.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땐 연필로 백지를 메운다. 망친 글은 태워버린다.
"제 마음은 결코 평온해질 수 없을 거예요."
루카스는 제각기 사연을 품은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아버지의 아이를 낳은 야스민,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불구의 몸으로 태어난 마티아스, 남편을 잃고 나서 병을 얻은 도서관 여직원 클라라 등등. 야스민과 그녀의 아이까지 함께 키우며 가족처럼 지내지만 신부님께 간다고 하고선 클라라를 만나기도 한다. 정작 클라라는 금요일에만 오는 다른 애인이 유부남이라서 슬프고 루카스는 그런 그녀 때문에 울고 싶다.
루카스는 상의에서 자갈을 가득 채운 양말을 꺼내서 그 남자의 머리를 쳤다. 그 남자는 빙판 길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국경경비대의 순찰대원들은 '그 남자'를 취객으로 알고 소환해서 뒤로 자빠져 있었는데 이마에 상처가 난 이유를 수상하게 묻지만 마찬가지로 소환된 루카스는 알리바이까지 만들어두는 치밀함을 보였다. 결국 '그 남자'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위협한다.
야스민은 자신의 아이를 루카스에게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진다. 자신이 장애가 있기 때문에 버려진 거라고 말하는 아이와 전쟁통에 엄마를 잃은 루카스의 슬픈 이야기가 교차한다. 아이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우리 엄마가 우릴 떠난 거야'라고 했다가 '나중에 나는 어쩌면 너의 아들이 될 것 같아'라고 말한다.
당 서기인 페테르는 자신에게 비밀 노트를 맡기는 루카스에게 묻는다. 클라라를 사랑하느냐고.
"저는 그 단어의 뜻을 잘 모르겠어요. 아무도 그 뜻을 모르는 것 아닐까요? 당신이 하는 그런 질문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그렇지만 그런 종류의 질문이 자네 인생에서 가장 흔한 질문이 아니겠어? 때로는 그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을 걸."
"그러면, 당신은요? 당신은 그런 질문에 한번 답해보세요. 당신이 연설을 하면 청중들은 박수갈채를 보내더군요. 당신이 한 말들을 당신은 진심으로 다 믿습니까?"
"난 내 말들을 믿어야 하네."
"하지만 정말 마음속 깊이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그건 나도 모르지. 나에겐 그 정도의 사치가 허용되지 않았다네. 난 어려서부터 두려움에 시달려왔어."
말은 "믿어야"하는 것이고, 마음속 깊은 진실은 사치인 현실. 아주 흔하고 근본적인 진실이 고통스러우면 인생 전체를 흔들 수도 있으므로 거짓말은 탄생한다. 거짓말은 생존에 유리할까?
클라라의 '그들'은 언제나 볼드체다. 그들은 뭉뚱그러진 복수형의 타인으로 그들 또한 주체성이 결여되고 폭력성만 난무하다.
새벽 세 시에 나는 창문을 통해서 보았어. 그들이 보이더군. 그들이 토마스를 건물 정면에 매달아 놓은 것도. 이웃들이 왔어요. 앰뷸런스가 나를 병원으로 실어갔지. 이제 와서, 그들은 그게 단순한 실수였다고 말하는 거예요. 토마스의 죽음, 내 병, 몇 달간의 입원, 백발이 된 나의 머리칼, 이 모두가 실수였다는 거지. 그러면 그들은 토마스를, 살아서 웃고 있는 토마스를 내게 돌려보내야지. 나를 품에 안고서, 머리를 어루만져주고, 따뜻한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쥐고, 눈과 귀와 입에 키스를 해주던 토마스를 말이에요."
사람의 목숨이 한낱 가벼운 장난감 같다. 소중한 것을 빼앗기고 병들어버린 클라라에게 그들은 실수로 가져간 장난감을 돌려주듯이 한다. 배터리는 잃어버렸다면서.
자신을 사랑해 주었던 그리운 누나를 오랜만에 만나고도 누군지도 모르는 불면증 환자에게 모든 관심을 빼앗겨버린 빅토르를 걱정한 누나는 집도 서점도 팔고 고향에 돌아가 쓰고 싶었던 책을 쓰며 살라는 제안을 한다.
나는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힐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갈 뿐이네.
불면증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 루카스는 그의 사연을 듣게 된다. 그 사연에서도 볼드체의 그들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직물공장의 소유주였던 아내는 원한을 품은 노동자에게 총을 맞고 죽었고 그는 집도 돈도 일자리도 잃는다. 소도시에서는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대도시에서는 반혁명의 저항과 투쟁, 파업으로 혼란하다.
"살아 있지 않으면, 돌아올 수도 없지."
"클라우스는 살아서 돌아옵니다!"
페테르가 루카스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잡았다.
"진정하게. 자네는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하네. 자네 형제도 아이 엄마도 돌아오지 않을 걸세, 자네도 알다시피."
루카스가 중얼거렸다.
"아니야, 클라우스, 넌 돌아와야 해."
클라우스는 과연 존재할까?
국경을 넘었지만 둘은 만날 기회가 있어도 의지는 없어 보인다. 클라우스의 묘연한 자취를 상상하며 읽어 내려간다.
페테르는 급기야 빅토르가 알코올 중독에 의한 섬망증 상태에서 누나의 목을 졸라 죽였다고 전한다. 그는 곧바로 앉아 조용히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었다고. 페테르는 빅토르가 쓰다 잡혀간 원고를 건네주고 루카스는 자신의 노트에 옮겨 적는다.
페테르는 빅토르에게 교수행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술에 취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술 취해 죄를 짓고 죽은 빅토르에 대해 말하려면 술에 취해야 한다.
마지막 날 저녁에 [빅토르]가 내게 말했네. '내가 죽을 거라는 건 알겠는데, 페테르, 이해는 못 하겠어. 내 누나의 시체 하나만으로는 부족해서 거기에 내 것까지 보태야 하는 건가? 하지만 누가 그 두 번째 시체를 원하는 거야? 신, 그는 분명히 아닐 거고. 그는 우리의 육신을 필요로 하지 않아. 그러면 사회가 원하는 건가? 사회는, 나를 살려두면, 아무에게도 소용없는 시체 한 구 대신에 한 권이나 또는 여러 권의 책을 얻게 될 텐데.'"
빅토르는 틀렸다. 한 권의 책 대신 여러 구의 시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인간의 시체를 태우려고 불을 피우는 곳에서 이해란 진실만큼이나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이 불구라는 이유로 버려질 거라고 불안해하던 마티아스는 급기야 아그네스와 그녀의 동생을 초대해 크레이프를 대접하기로 한 날 루카스와 아그네스, 그녀의 동생 사무엘의 단란한 모습에 불타는 질투를 느끼고 급기야 목숨을 끊는다.
클라우스가, 돌아왔다. 하지만 페테르는 클라우스의 존재를 끝없이 의심한다. 페테르가 건넨 루카스의 노트. 그것은 루카스의 존재의 증거이다.
"당신은 왜 그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소?"
"우리는 서로 헤어지기로 결정했거든요. 완전히 분리되기로 했던 겁니다. 국경만으로는 부족해서, 침묵까지 지켰던 거지요."
"그렇지만 당신은 돌아왔소. 왜 왔지요?"
"시련이 너무 오래 계속되었지요. 나는 지치고 병들어서 루카스를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클라우스는 돌아왔지만 그의 흔적은 수상한 구석이 있다. 클라우스가 소유하고 있던 원고는 대부분 루카스의 글이 적혀 있었으므로 루카스의 존재는 입증되었지만 클라우스는 마지막에 잠깐 등장할 뿐이므로. 이야기 중간중간에 클라우스의 존재와 안부에 대해 묻는 언급이 있으나 그는 둘이 헤어졌다거나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말만 한다. 그 말은 사실일까?
글 전체가 한 사람에 의해서 일정 기간에 집중적으로 쓰인 것처럼 일관된 특징을 가지며, 그 기간은 여섯 달 정도, 즉 클라우드 T가 우리 시에 머물던 기간과 일치한다.
그 내용에 관해서 말하면, 단순한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거기에 묘사된 사건이나 등장인물들은 클라우스 T가 소위 할머니라고 부르는 한 사람 외에는, 그 누구도 호적계에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아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큐레이터 노트: 어떤 게 진짜 나인지 모를 때, 타인을 통해서만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때가 있다.
*오늘의 책: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책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제2부 타인의 증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