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는 일에 두려움은 없다. 길을 찾았다는 느낌은 '점'이고 삶은 그 점을 잇는 여정이니까.
다만 자꾸 잊는다. 세상 만물은 사라지기 마련이고 살아남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아주 많은 꿈, 아주 많은 목소리와 언어들이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스러져 가는 것을 목격해 왔으니까.
무언가를 보존하고 지키려는 마음은 더 큰 상실감을 가져온다는 것도 알면서 자꾸 잊는 사실이다. 애써 과거를 잊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그냥 놓아버리는 것이다.
성인기는 신중한 예상과 철학적 기억으로 이루어지고, 그 덕분에 우리는 좀 더 느리고 착실하게 길을 찾는다. 하지만 실수를 두려워하는 태도는 그 자체 크나큰 실수일 수 있다.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실수일 수 있다. 삶은 늘 위험한 법이니, 조금이라도 덜 위험한 삶은 이미 무언가를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질문 수업을 구상하는 순간부터 내 질문은 답으로 끝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또 다른 질문으로 끝났다. 이런저런 새로운 시도를 하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할 때쯤 더 나은 질문으로 방향을 트는 식이었는데 당연히 실수도 잦았다. 우리는 깔끔한 구멍보다 지저분한 시나리오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도 아니, 어른이 되어서 더더욱 실수는 낯 뜨겁고 권위가 서지 않는 일이다.
당신은 아무리 넓은 영역을 보게 되더라도 늘 당신이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땅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늘 등정을 정복으로 묘사하지만, 실은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세상이 점점 더 커져서 우리는 그에 비례하여 자신이 점점 더 작아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를 둘러싼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 우리가 헤맬 공간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고 압도되지만 해방감도 든다.
하지만 리베카 솔닛의 글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잊었던 길 잃기의 기쁨, 길을 잃어야만 마주하는 기쁨,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한 세계에 대해 다시 상기했고 위로를 받았다. 나는 원래 길 잃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지.
이 '잡히지 않음'의 기쁨을, 끊임없는 모색의 즐거움을 잊는다면 의미 없는 물음표 한 다발로 눈앞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꼴 밖에 안 될 것이다. 나는 툭하면 끝에 '것'이라는 말을 쓰는 편인데 자유만큼이나 무언가를 통제하고 싶은 본능을 지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통제하면서 벗어나고 싶은 이 모순된 마음은 뭘까. 나는 불안하고 불편한 채로 괜찮은 삶을 가르쳐주고 싶은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