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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관점 그리고 남는 것들

by 뭉클

정치, 금융, IT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다. 유대인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네 사람인 아인슈타인, 빌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스티븐 스필버그. 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교육서로서 탈무드를 꼽는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가톨릭 교육을 받았고, 스필버그 감독은 종교를 싫어했으며, 마크 저커버그는 무신론자라고 한다. 심지어 빌게이츠는 유대인도 아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유대인이 아니냐는 근거 없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과연 하브루타는 성공하는 교육의 대명사일까?


종교적 유대인은 유대인 교육기관인 예시바에서 하루 종일 하브루타를 한다. 토라와 탈무드, 미시나(구전 율법)을 주된 텍스트로 삼아 가르치고 배운다.


하지만 예시바에서는 영어나 수학, 과학 등 일반적인 과목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에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대기업에 들어간다거나 창업을 한다거나 전문직으로 진출하기도 힘들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연구를 통해 학문적 성취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에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거나 사업적으로 성공하기도 어렵다.


한국에서 말하는 하브루타식 교육과 이스라엘 현지의 교육이 왜 다를까?


하브루타는 교육 방법이 아니라 관계를 형성하는 우정을 의미한다. 한국 학교는 경쟁 위주의 사회이고 이스라엘의 학교는 친구의 부족한 부분을 도우면서 학습 능력도 함께 향상되도록 돕는 문화를 바탕으로 한다. 어쩌면 다른 토양에 엇비슷한 씨앗을 심고 같은 산출물을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초등학교처럼 6년 내내 같은 반 친구들과 지내게 한다거나 안식일을 흉내 내며 집 안에 틀어박혀있는다고 가족 간의 대화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 소설수업에서 하브루타 교육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까?
- 영어질문수업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입시와 경쟁으로 가득한 이곳에서 억지로 질문을 유도하고 문학의 매력에 대해 알기도 전에 질려버리게 하는 건 아닐까?


아주 천천히 가려고 한다. 질문이란 사랑하는 사이나 호감 가는 대상에게 호기심이 생기면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다.


하브루타의 핵심은 교육과정이나 평가가 아니라 일상의 수다로 시작해서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대화일지도 모른다. 관계 중심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은 숨 쉬듯 질문한다. 우리의 끈끈한 관계는 맛있는 것이 생기면 나눠 먹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더욱 견고해진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가능하다.


코로나 시기에 중학생 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친구를 사귀는 경험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 우정이 변하는 모습에 새파랗게 질리고 지나치게 배려했으며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이교도의 것처럼 배척했다. 눈코 뜰 새 없는 시간표도,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도 견딜만했지만 불통의 시간은 더욱 지독해 보였다. 불안한 마음, 긴장한 몸은 아직 어린아이들에게 관계와 협력보다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정치로 기울게 만든다.


공부는 너무 힘든데 친구들이랑 노는 게 너무 재밌어서 자퇴가 고민된다던 옛 제자의 고민이 기억나 웃음이 났다. 결국 고등학교 3년을 무사히 마치고 졸업했지만, 어쩌면 학교의 본질을 그 학생에게서 본 게 아닐까 싶었다.


'질문이 있는 소설 수업'에서 질문도 빼고 소설도 빼고 수업마저 다 지워버려도 아이들이 남을 수 있을까? 나는 새삼 '이 수업이 누구를 위한 것일까?' '나는 무언가를 어설프게 흉내 내는 불편을 감수하고 있진 않나?' 조심스럽게 자문해 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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