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살 여름, 데미안의 세계에 파묻혀 헤매던 소녀는 어느새 그 난해한 언어를 이해하고도 남을 나이가 되었다. 10대 보다 더 막막했던 20대에 서점을 X-RAY 찍듯 돌아다녔다. 성지 순례나 짧은 도보 여행 같은 것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을 때가 있다. 글이 고프다는 신호다.
엄밀히 말하면, 남의 글. 남이 쓴 글. 남이 잘 쓴 글.
어릴 적 할아버지 댁에서 만나는 고모부는 툭하면 소파에 책을 끼고 앉아 있는 내게 '안녕, 문학소녀!'라고 불렀고, 이모가 나를 한참 찾아도 없어서 작고 구석진 빈 방에 가보면 엎드려서 늘 무언가 읽고 있었다고 했다. 어쨌든 섭취한 글은 내 몸에 그대로 남아 있지 않고 그 속도가 느릴 때도 있지만 결국에 다 종이 위로 토해 내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면 다시 고파진다. 남의 글이.
사람은 열심히 쌓은 뒤, 다시 부서져야 해.
어느 순간 섭취해 내 것으로 만든 앎들이 나를 옥죄어 올 때가 있다. 뻔하고 고집스러운 무엇. 그럴 땐 새로운 글로 다시 얼어붙은 강의 얼음을 깬다. 내가 옳다고 믿는 순간 남는 건 아집과 분노뿐이다. 쌓아 올린 독서 기록만큼 나는 아주 뻔뻔하고 뻔한 사람이 되어 있다. 새로워지는 일은 자신감을 잃게 하기보다 자신을 잃을 용기를 준다.
내가 정의한 나에 갇히지 않는 법을 시를 읽고 쓰면서 배웠다. 그것은 도달해야 할 성취라기보다는 지속적인 훈련의 상태에 가깝지만 말이다. 살아있다는 느낌은 불안과 어딘가 닮아 있다. 안정이 권태와 닮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