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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Sep 03. 2024

하 수상한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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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파편들이 우주 그 거대한 공간을 꽉 채울 때가 있다. 책임 소지 운운하며 비난조로 공격하던 선배의 톤과 안색, 제대로 가져본 적도 없으면서 잃어버린 것에 놀라고 한탄하던 격일 주기의 대화, 거리를 걸으며 느낀 우리들 사이의 감각. 생각보다 가깝고 놀랍도록 먼. 깊은 그리움을 준 부모와 형제들.


시간도 공간도 모두 제각각이며 진실도 거짓도 아닌 기억들에 대처하는 방법 중 하나는 거리로 나서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거리를 스쳐가는 수많은 군중을 관찰하는 일이다. 어떤 판단도 없이, 한 장면에 오래 머물지도 않고 한 명 한 명, 한 무리 두 무리에 관해 스케치하듯이. 밀려오는 도시에 대한 감각은 몹시 외롭고 서늘하다가도 그 안에서 같은 운명을 짊어진 사람들 사이에 고유한 우애 같은 것을 느낀다. 한 발짝 물러나 인간의 별난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건 거리가 주는 축복이며 거리 두기가 보여준 마음의 지혜.


사라져 버리고 싶은 날 어쩌면 가장 살고 싶었던 것처럼 마음속 분노와 자의식으로 고통스러우면서도 끝끝내 그림자처럼 진득거리는 걸 떼어내지도 못하는 모순된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있는 하 수상한 거리.


오십 대 후반 비비언 고닉은 어느 쌀쌀한 봄날 오후에 23번가 시내 횡단 버스를 타고 가다 9번 애비뉴 정류장에서 내렸고,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반백여 년 전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든 자신이 기억하는 그런 식은 절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세상에, 나는 내 울분을 제조해 내려고 태어난 사람이구나. 하지만 왜? 대체 왜?'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그 이유를 알게 되는 건 아니다. 그저 '저런, 나이를 먹고도 아는 게 없군.'이라고 쓰도록 지면이 허락된다는 게 부러울 따름이다. 어떤 삶은 대책이 없다고 말하면서 대책을 마련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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