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소비해서 해결하려는 마음에는 미제에 대한 미련한 미련이 있다.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 잠시 그 방법을 잊고 있을 뿐, 실은 가벼운 마음으로 잘라낼 머리카락과 폰트와 튜브가 있다고. 그건 애초에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나 평화 따위를 바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산뜻하고 간편하다. 오늘 아침저녁으로 참아낸 것이 있다면 그간 향유해 온 중독이고 리추얼일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베어 먹던 이야기 대신 연필을 사각사각 깎아 종이 위에 반듯한 선을 긋는다. 자를 대지 않고 지면이 압력을 받아 눌리는 느낌을 받으면서. 마치 글을 쓴 사람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간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이야기는 필요 없다, 이야기는 강요할 게 아니니까, 그저 삶, 그게 내가 한 실수다, 여러 실수 중 하나, 날 위한 이야기를 원했던 것, 삶 자체로 충분한데." 멈춤. "나는 진보하는 중이다." 멈춤. "나는 여기 있다." 멈춤. "나는 여기 머문다, 앉아서, 내가 여기 앉아 있는 게 맞다면, 앉아 있다고 종종 느낀다, 가끔은 서 있다고, 둘 중 하나다, 아니면 누워 있거나, 또 다른 가능성이다, 누워 있다고 종종 느낀다, 셋 중 하나다, 아니면 무릎 꿇고." 멈춤. (210)
이야기는 결국 시선이고, 끊어지지 않고 깎이는 사과 껍질 같은 것인데 내가 나를 기다리는 동안 앉지도 서지도 누워있지도 어느 쪽도 하지 않을 때에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억지 이야기보다는 삶 자체로 지금 여기에 있는 편이 낫다. 어째서 이 구절에서 울컥하는 걸까. 진보하는 중이다, 말고 멈춤에서. 이야기보다는 계속해서 가끔 서고, 가끔 앉아있고, 가끔 누워있다가 또 어떤 자세를 취할지 모르는 삶에 대해서 알게 되는 일이 곧, 베케트*를 듣는 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구상에 있기만 하다면. 필요한 거라곤 숨 쉬는 게 전부다." 멈춤. "그래 여러 순간이 있지, 이 순간처럼, 있을 법한 존재로 내가 거의 복원된 듯한. 그런 뒤에는 지나간다, 모두 간다, 그리고 나는 다시 멀리 있다. 나는 멀리 나를 기다린다. 내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211)
아무리 열어도 벽돌벽 밖에 없는 문에 대해, 주변이 온통 망망대해인데 저을 노가 없는 통통배에 대해, 유쾌하게 떠들어대면서 생각한다. 이젠 좀 다른 꿈을 꾸고 싶다고. 좋은 꿈, 나쁜 꿈이 뭔진 모르겠고 조금 더 멀리 가는 꿈으로. 이런저런 순간들을 지나쳐 고르는 숨 만이 새로운 이야기의 기원이기를. 멀리서 나를 기다리는 나를 위해서. 멈춤. 그리고 지나간다. 멈춤. 그리고 다시 멀리멀리.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진 여전히 모르겠지만 어느 쪽도 나 인 것 같진 않아서 여전히 베케트를 듣는 일의 효용에 고개를 끄덕인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고도를 기다리며》로 프랑스 문단과 극계에서 크게 호평을 받았다. 1961년에 구두점이 전혀 없는 산문인 《어떤 식으로 그것이》, 1963년에는 《아! 아름다운 나날》 등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그 작품들을 통하여 세계의 부조리와 그 속에서 의미도 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절망적인 인간의 조건을 극히 인상적인 언어로써 허무하게 묘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