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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말이 곱다고 오는 말이 늘 곱진 않다.
말은 와전되고, 오해를 낳는다. 그건 말이 가진 미끄러운 속성이다. 발화 상황에 놓인 모든 사람이 같은 상황에 놓여 있지 않으며 대체로 '통하는' 말하기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내가 살아온 사회에서는 그렇다. 가을의 문턱 9월, 일련의 해프닝을 통과하면서 미처 인지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말의 여정 혹은 역정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언행일치는 어느덧 고전에나 어울리는 말처럼 아득하고.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같은 음식도 플레이팅이 중요하며 이것은 시간을 들여 연마해야 할 능력이다. 즉,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이런 능력이 저절로 생기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자칫 '하나의 언어에는 한 가지 의미만 담아야 한다'는 당연해 보이는 원칙을 어기기 쉽다. 이중 메시지는 텅 빈 메시지이며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만 드러낸 꼴이 된다.
틀린 말도 모이면 진실에 가까워진다. 틀린 말도 세게 힘주어 오래 말하면 진실에 가깝게 불편하다. 말은 많지만 정작 해야 할 말은 담겨 있지 않고,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을 못 참고는 말하지 않은 척하기도 한다. 미끄러진다. 애매하고 모호하다.
말은 글보다 먼저 태어나 기척도 없이 죽는다. 박준 시인의 말처럼, 오늘 내가 하는 말이 내 생의 마지막 유언이 될지도 모른다. 말이든 글이든 최종 목적은 '듣기'일 것이다. 청각을 상실한 말과 글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침묵도 교육과정이 될 수 있을까. 검열이나 억압의 침묵이 아니라, 배려와 자유의 침묵이 개설될 수 있다면 이건 평가할 수 없어서 개설이 불가능할까.
말의 칼날을 다듬으면서 그 효용에 대해 생각한다. 베지 못하는 칼과 베는 칼 각각의 책임에 대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