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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빛 Apr 02. 2019

찹쌀가루 섭산삼과 맨드라미 꽃물 잡채 그리고 400년

경상북도 영양 석계종가 음식디미방

  뜨거운 태양 아래 빛나는 맨드라미를 보았다. 건조한 기후에도 잘 견디어 양지에서 잘 자라며 생긴 모양은 닭의 벼슬을 닮았다. 맨드라미의 붉은빛을 물들인 음식 중에는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의 잡채가 으뜸이다. 


  경상북도 영양군에는 두들(둔덕) 마을이 있다. 1640년 석계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을 피해 이곳에서 재령 이 씨의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들의 자취를 보면 좋은 것을 나누고 후손을 보살피려는 마음이 돋보인다. 특히 석계의 아내였던 장계향은 칠십 세에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1670년)’을 한글로 기록한다. 음식디미방은 ‘음식 맛을 아는 법’이란 뜻이다. 1600년대 중엽과 말엽, 경상도 양반가의 음식조리법과 저장, 발효식품, 식품 보관법 등 146가지를 살필 수 있다. 종부의 며느리로서, 어머니로서,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음식을 조리하고 함께 나누려는 그녀의 진심이 담긴 책이다.      

조귀분 여사

  석계종가의 조귀분(70세) 종부는 어느새 장계향 할머니께서 책을 쓰시던 나이가 되었다. 종부는 조리서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다섯 가지를 꼽는다. 섭산삼과 잡채, 어만두와 석류탕 그리고 도토리 죽이다. 하나하나 다듬어 준비만 해도 반나절이다. 

  섭산삼과 잡채에 대한 일화는 광해군의 일기(1608~1623년)에도 나온다. 섭산삼과 잡채의 맛이 어찌나 좋으며 정갈한지 한효순은 사삼각로, 이충은 잡채 상서로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아 벼슬 한 자리씩을 얻게 된다(沙蔘閣老權初重 雜菜尙書勢莫當).      


· 섭산삼과 잡채

  모래에서 캔 산삼이라는 의미의 사삼각로는 더덕으로 만든 밀전병이다. 더덕을 소금물에 담가 쓴 맛을 빼고 방망이로 조근조근 두드려 찹쌀가루를 묻혀 기름에 튀긴다. 한 입 베어 물면 아삭한 더덕향이 목줄기를 타고 흐른다. 잡채에는 꿩고기와 10가지 채소가 들어간다. 꿩 육수에 된장, 밀가루, 참기름, 국간장, 후추를 넣어 즙을 준비한다. 채소를 섞어 그 위에 뿌려 먹기 위함이다. 야채마다 맛과 향이 있지만 양념된 즙을 뿌리면 구수한 맛이 더해져 술안주로 좋다.


섭산삼


  “우리 잡채에는 당면이 들어가지 않아요.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잡채의 야채는 참기름에 볶고 국간장으로 간을 하라고 해 놨는데 송이라든지 도라지처럼 하얀 야채는 소금으로 간을 합니다. 그래야 정갈하고 깔끔해 보입니다. 그리고 동아는 맨드라미 물을 들여 붉은빛을 곱게 냅니다.”

  그렇다. 당시의 잡채에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당면이 주재료가 아니었다. 당면은 감자나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국수로 중국의 면이다. 또한 한국 고유의 잡채를 더욱 아름답게 장식한 것은 동아(동과·동화)를 곱게 물들인 맨드라미 꽃이다. 꽃에 달려 있던 씨앗을 숟가락으로 긁어내어 깨끗이 씻은 후 냄비에 꽃잎을 담는다. 꽃이 잠길 만큼의 물을 자작하게 부어 끓이면 꽃향기와 붉은 물이 남는다. 채에 받혀 낸 맨드라미 꽃물은 투명하고 곱다. 


잡채

  맨드라미 꽃물을 들이는 이유는 보기 좋게 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꿩고기의 신맛을 부드럽게 하고 혹시나 있을 꿩의 독을 중화하는 데 있다. 음양의 조화와 맛의 효능을 높이기 위함이다.      



· 석류탕과 어만두 

  만두 모양이 석류 열매를 닮은 석류탕. 장계향 할머니는 석류탕을 서너 알씩 담아서 술안주로 쓰라고 하였다. 석류탕의 만두 속은 꿩고기와 두부, 무, 파, 표고버섯, 석이버섯, 후춧가루를 기름간장에 볶아 만두소처럼 만든다. 점잖게 한 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이다. 표고와 석이버섯의 향이 신선한 두부 알과 섞여서 부드럽게 넘어간다. 만족스럽다.


석류탕



  어만두는 숭어의 껍질을 얇게 저며 만다. 숭어는 다른 생선에 비해 표면이 쫀쫀해서 만두를 말아도 허물어지지 않는다. 숭어의 생고기를 얇게 종이처럼 저민 후 다진 꿩고기와 버섯으로 만두소를 만든다. 어만두의 모양은 구부정한 것이 초승달 같다. 쫀득한 어만두의 표면을 이 끝으로 느끼자마자 부드러운 꿩고기와 두부가 달려 나온다. 밀가루로 만든 만두피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음식을 제대로 느끼려면 따듯할 때 먹어야 한다지만 식은 후에 먹어도 비리지 않고 숭어 피의 맛을 섬세하게 감상할 수 있다.       


어만두


· 도토리 죽

  종부의 이야기에 의하면, 1640년 장계향 할머니는 이곳에 정착하기 전에 먼저 도토리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어려운 시국에 굶주린 사람들이 마을을 찾게 되면 도토리 죽이라도 나누어 먹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고소한 도토리 죽으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세상에 나가 자리를 잡게 되면 그녀의 혜안을 존경하고 칭송하여 여중군자, 여중 학자라고 불렀다.     


도토리 죽



  “처음 시집오니까 불천위제사를 지내는데 제관들이 백 명 가까이 오셨어요. 전국에서 오니까 우리 문중에 지손들이 백 명 가까이 오고 구경 오겠다는 사람들이 또 있어요. 떡만 해도 열 가지를 해요. 거기다 다식을 박지. 잣도 궤 올리고 그것을 다 해요. 그러니까 불천위 제사가 다가오면 열흘 전부터 마음을 다잡아야 돼요.”


  힘들었던 며느리는 만삭이 되었어도, 아이를 키우면서도 종부의 자리를 지켰다. 아이들도 제사가 다가오면 제관들의 도포를 다리며 어머니를 도왔다. 댓돌 높은 종가로 총총히 올라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장계향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 위 글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지역 N 문화' : 우리 집의 맛과 향토 음식에 게재된 글입니다.


석계종가 종부 조귀분(여, 70세) 여사의 음식은 정갈하고 아름답다. 언제나 흔쾌히 도움을 주셔서 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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