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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빛 Apr 10. 2019

생맥주 집은 생맥주가 맛있어야, 노가리는 천 원이 예의

서울 을지로 노가리 골목 을지오비베어

  오후 햇살이 한창인 을지로 3가의 인쇄골목, 연탄불 위에서 고슬고슬하게 구워지는 노가리 냄새가 구수하다. 맥주 좀 마셔본 사람들은 인쇄골목을 노가리 골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는 38년 된 생맥주집이 있다. 몇 평 안 되는 가게에는 벽을 바라보고 있는 ‘ㄱ’ 자형 테이블과 가게 중앙을 가로지르는 나무로 만든 좁은 ‘바’가 있다. 규모에 비해 디스펜서(dispenser)가 달린 냉장설비는 꽤 크다. 그 뒤로는 오래된 생맥주 잔이 골동품처럼 진열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맥주를 생산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20년 8월 22일 동아일보의  「맥주 원료 시작(試作)」이라는 기사를 보면, “삿포로 맥주를 만드는 일본 맥주회사가 경남도청의 원조를 얻어 맥주의 원료가 되는 보리 종자를 경상남도 각 군에 배부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맥주 원료인 보리는 한국에서 생산하였다. 

  

  그러나 맥주는 일본에서 만들었으며 한국이 역으로 수입하는 상황이었다. 이후 1933년 일본의 자본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맥주공장인 조선맥주회사와 소화기린맥주회사가 설립된다. 광복이 되고 미군정이 관리했을 때에는 미군이 마실 맥주를 판매했다. 맥주회사의 민간 경영은 1952년부터 시작됐다. 현재 OB(Oriental Brewery) 맥주는 소화기린맥주에서 시작하였고, 라이트진로맥주는 조선맥주(1933년부터 ‘크라운맥주’라는 상표로 맥주를 생산)에서 시작하였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맥주는 대중의 술이 아니었다. 특히 생맥주는 청바지에 통기타를 둘러 맨 젊은이들의 술이었을 뿐, 여전히 소주와 막걸리를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는 직장인들을 거리로 내몰았고 술집으로 배회하게 만들었다. 간단한 식사와 소주를 걸친 사람들은 생맥주를 호프라고 부르며 늦은 밤의 ‘2차 호프’는 당연한 것이었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

  강효근(남, 92세) 씨가 운영하는 을지오비베어는 ‘할아버지 고추장 집’으로 통한다. 1980년 12월 개업하여 지금까지, 아침 10시에 문을 열고 밤 10시에 문을 닫는 생맥주집이다. 술을 파는 주점이 밤 10시에 문을 닫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꼬장꼬장한 주인장 나름의 가게 운영철학이 있다. 첫째, 이른 새벽 생맥주를 공급받아서 냉장온도를 조절한다. 그리고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골목을 쓴다. 골목의 인심을 사서 ‘골목의 삶과 함께하는 술 문화’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둘째, 계절과 상관없이 밤 10시가 되면 손님을 귀가시킨다. 손님들의 건강과 가족을 생각하는 ‘바람직한 술 문화’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손님들은 귀가를 독촉하는 주인장의 호통에 술을 마시다 말고 일어나야 한다. 불평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는 38년 동안 스스로의 규칙을 어긴 적이 없었다.  

        

  생맥주는 신선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병맥주와 달리 산소와 차단되어 유통된다. 나이 든 주인장은 생맥주 관리와 보관 방법이 남다르다. 생맥주의 신선함을 지키기 위해 생맥주 통을 상온에 그냥 두지 않으며 냉장보관 온도도 그가 정한다. 겨울에는 4도, 여름에는 2도. 그러나 날씨의 변화에 따라 미묘한 차이는 있다.     

  주인장은 35년 간 생맥주를 내리는 디스펜서를 놓지 않았다. 그만의 노가리 다듬는 방법과 특제소스 만드는 방법을 아무에게도 전수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다가 2013년 병환으로 쓰러지면서 맏딸 강호신(59세) 씨가 물려받게 되었다. 맏딸은 아버지의 가게 운영 철학을 그대로 학습했다. 장인의 도제(徒弟) 교육처럼 생맥주를 내리는 근엄한 표정까지도. 



  아버지가 연세가 높으신데도 물려받으라는 말씀을 안 하셨어요.
딸인 제게 물려주고 싶지 않으셨을지도 몰라요.
아버지가 노가리 골목을 시작하셨는데 제가 하지 않으면
그러한 아버지의 노력이 사라질까 봐 하게 되었어요.
이제는 아버지의 노고를 이해하게 되었죠.
          

  예순을 앞둔 딸은 아버지의 전화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받는다. 그럴 때면 날씨의 변화와 생맥주 보관 온도, 안주 준비, 매출 현황을 차례로 보고한다.


  날씨가 흐리잖니, 햇빛 쨍쨍한 날과 다르니까 이렇게 해봐라.
여기는 노가리 골목이잖니, 노가리는 천 원에 파는 게 예의다.
절대 올려서는 안 된다.
  

   처음 생맥주 가격은 380원이었고 오비에서 공급한 안주가 100원이었다. 500원을 내면 20원을 거슬러 받았다. 지금 생맥주의 가격은 3,500원에 노가리 안주는 1,000원이다. 생맥주를 마실 때 노가리를 주안주로 선택한 이유는 부담 없는 가격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머니 가벼운 직장인들은 생맥주의 성지로 이곳을 꼽았고 주인장의 애정 어린 호통을 받으면서도 부지런히 찾았던 것이다.          


  필자는 딸이 내려준 생맥주를 마셨다. 잔의 바닥에서 치고 올라오는 탄산과 흰 거품은 생맥주의 금빛을 돋보이게 한다. 흰 거품을 입술에 살짝 묻히고 넘어가는 맥주의 온도는 차갑지 않고 부드럽다. 상상했던 등골 오싹한 맥주가 아니다. 적정한 탄산과 온도가 맥주의 맛을 살리고 향을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이곳의 자랑인 특제소스는 생맥주의 맛과 어울린다. 생맥주와 노가리, 특제소스의 삼박자는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맛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저 구석에서 늦은 밤까지 노가리 배를 찢어서 가시를 빼고 두드리던 아버지의 갈라진 손처럼 그녀의 손도 몇 년 만에 거칠어졌다. 그녀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그 덕분에 이 맛있는 맥주를 앞으로 20년은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 위 글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역사문화유산, 세월의 흔적, 근대문화역사유산' : 근대 신문 속 음식 이야기에 게재된 글입니다.


을지오비베어는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노가리 골목을 탄생시켰다. 아버지 강효근(남, 92세) 씨는 손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았다. 그의 의지를 딸 강호신(여, 59세) 씨가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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