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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빛 Apr 16. 2019

돼지는 쫀닥 쫀닥 주디에 피순대 먹으면 다 먹은 기다

칠곡 왜관의 성주식당

  돼지머리를 내리치는 도끼날은 힘차고 날카롭다. 순대국밥에 들어가는 돼지머리 고기 손질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끼가 정확한 부위를 단번에 잘라내야 한다. 만약 실수라도 하게 되면 살이 으깨지고 뭉그러져서 모양도 맛도 좋지 않다. 그렇게 부위별로 잘린 돼지머리를 뜨거운 물에 담가 잡냄새를 뺀다. 김영기(남, 62세)씨는 이러한 도끼질만 30년이 되었다.    


  칠곡의 왜관(倭館)은 조선시대에 일본인이 통상(通商)하던 곳이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회유책으로 일본인의 왕래와 무역을 허가하였다. 그리고 부산과 서울, 낙동강 부근에 일본 사신의 유숙 등을 위한 공관을 설치하게 된다. 이 중 그 지명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곳은 왜관뿐이다. 

  1905년 낙동강 동쪽에는 왜관역이 세워졌고 칠곡 왜관 철교도 개통되었다. 6.25 전쟁 때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이곳은 피난민들의 유일한 인도교였으며 치열했던 접전지역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1960년경에는 미군기지가 생겼다. 1968년 2월 착공하기 시작하여 2년 5개월 만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는 실로 신화와 같았다. 경부선 철도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꼬박 12시간이 걸렸는데 이 거리를 5시간으로 줄였다. 이처럼 왜관의 역사는 파란만장하게 바삐 흘렀다. 왜인과 상인들이 넘쳐났고 군인과 피난민들이 머물렀다. 그리고 경부고속도로 현장의 일꾼과 여행객들.     

  이들의 피곤한 주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1960년대 왜관역 주변에는 순댓국집이 생겼다. 40년 전에는 우시장도 있었고 도살장도 있었다. 신복희(여, 60세)씨의 기억으로 30년 전 순댓국 가격은 이천 원이었다. 


  왜관의 순대는 다른 지역과 달리 돼지선지를 주로 하여 만든다. 살아있는 선지(피) 한 말을 채로 걸러 신선한 것만 돼지 소창에 넣는다. 엉긴 피는 꾹꾹 짜서 풀어야 하고 위로 올라오는 거품은 걸러내야 제 맛이 난다. 야채는 넣지 않는다. 당면만 조금 들어갈 뿐이다. 


  도끼로 쳐서 부위별로 잘린 돼지머리는 지름 1미터 남짓한 큰 솥에 넣는다. 머리 다섯은 쳐야 솥이 채워진다. 엄나무를 넣어 3시간은 삶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불이다. 연탄불로 삶아야 고기가 뭉근하고 쫄깃하다. 돼지 주디(입)와 혓바닥은 2시간이면 족하다. 먼저 주디를 건져내어 식기 전에 돼지 이빨을 뺀다. 주디가 잘 익으면 살은 쫄깃하고 이빨도 딱 떨어진다. 돼지 사골은 이틀을 우려내어 깊은 맛이 난다. 맛이 깊어 따로 간을 보지도 않는다. 그 자체로 손님상에 내면 그만이다.    


  왜관역에서 반평생 순대만 만들어 온 주인의 부엌에는 닳고 닳아 끝이 뾰족해진 부엌칼이 있다. 이렇게 닳아 없어진 칼만 해도 수십 개다.   


  “원래 돼지는 주디(입) 먹으면 다 먹었다고 한다. 주디가 쫀닥 쫀닥해서 제일 맛있다. 그거는 국밥에 드가고 수육에는 머리 고기만 드간다 안카나.”

  이 집의 돼지머리 고기는 쫀득한 젤리와 같고 순대는 설탕 없는 브라우니와 같다. 그 맛은 씹을수록 고소하여 가슴으로 기억된다.




 위 글은 한국문화원연합회 '지역 N 문화' : 우리 집의 맛과 향토 음식에 게재된 글입니다.


   성주식당 정호연(여, 85세) 씨는 평생 피순대를 만졌다. 이제는 아들 김영기(62세) 씨와 며느리 신복희(60세) 씨가 그녀의 손맛을 이어가고 있다. 김씨의 서글한 눈빛과 신씨의 당찬 얼굴이 눈에 선하다. 보고 싶은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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