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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빛 Mar 15. 2020

단팥죽에 찐빵을 찍아 먹는 거시더

포항 구룡포 철규네 단팥빵 단팥죽

  

  구룡포 초등학교 앞의 길목에는 황색 점멸등만 깜빡인다. 비가 내리는 새벽 3시, 학교 앞의 조용한 어둠을 네모난 문만큼 오려낸 작은 가게가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따듯한 온기가 가득하다. 마음씨 좋은 박상규(77세) 할머니께서 몸부터 녹이라며 아랫목에 데워둔 비타민씨 드링크를 손에 쥐어주신다.        


  



  벌써 커다란 솥에서는 설설 팥이 끓고 있다. 전날 물에 담가 하루 종일 쓴맛을 뺀 팥이다. 통팥은 맑은 물에 우려 쓴맛을 빼야 탈이 없다. 팥이 익으면 설탕과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춘다. 할머니는 구수한 경상도 말로 찐빵과 단팥죽 만드는 비법을 설명해 주신다. 


빵 앙꼬라고 하지.
팥이 북덕북덕 끓으면
옥수수 전분을 풀어 넣어가지고
 빨리 돌려야 되는 기라.
빨리빨리 저사야지(저어야지).
그래서 걸쭉해 지요.


  “빵 앙꼬라고 하지. 팥이 북덕북덕 끓으면 옥수수 전분을 풀어 넣어가지고 빨리 돌려야 되는 기라. 빨리빨리 저사야지(저어야지). 그래서 걸쭉해 지요. 그러면 소쿠리 보드라운 거 받치고 이래, 이래 팥물이 줄줄줄 나오지. 그래 팥죽 쑤고 찐빵 앙꼬 맨들고 국숫물 만들어야지. 새벽에 안 하면 아침에 바빠가 몬 합니더.”    

  



  일제 강점기 이후, 외국에서 밀이 수입되면서 밀가루는 쌀값에 비해 저렴했다. 1923년 9월 6일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도 물가가 올랐는데 ‘남대문 시장에서는 백미 한 되에 34전 하던 것을 40전에 매매하며, 사탕은 26전 하던 것이 28전에, 밀가루도 다섯 되 한 부대에 56전 하던 것이 60전에 매매되는 중’이라 하였다.”라고 전한다. 즉 쌀 한 되의 가격이면 밀가루 세 되 정도를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63년에는 미국으로부터 대규모의 밀가루가 수입되었다.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생활 개선운동도 펼쳤다. 그 명분으로 정부에서는 ‘분식의 날’을 별도로 정했다.          


할머니의 어머니가 쓰시던 그릇


  “그때는 도나쓰(도넛, Doughnut)도 굽고 호떡도 굽고 부시럼 빵이라 커는, 칼빵이라 커는 게 있거든요. 시장에 가면 빵 이만하게 뿌하게, 이래 칼로 끊어 파는 게 있어요. 그 옛날에는 칼빵이라고 했거든요. 그 장사를 하니까 너무 장사가 잘 댄 기라. 그래 아들 학생들 소풍 가면, 도나쓰 하고 맨들어 배께(바깥에) 내놓으면 싹 나가.”        

  철규분식은 구룡포 초등학교 앞에서 찐빵과 단팥죽을 60년 넘게 팔아왔다. 6·25 전쟁을 피해 이곳에 자리를 잡은 뒤, 할머니의 친정어머니는 먹고살기 위해 빵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8살 때인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머니의 빵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리대에 손이 닿지 않자 아버지는 발받침을 마련해 주셨다.


  하루에 한 포대, 20kg의 밀가루를 사용했는데 밀가루가 떨어지면 어린 소녀는 포항의 죽도시장으로 심부름을 다녔다. 밀가루 포대는 지금처럼 종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광목천으로 만든 밀가루 포대는 밀가루를 다 쓰고 나면 그것대로 쓰임새가 있었다. 솜씨 좋은 어머니는 깨끗이 빨아서 치마도 만들고 속옷도 만들어 주셨다. 시장으로 심부름을 가는 날이면 큰일이라도 하는 것 마냥 신이 났다. 밀가루 포대로 만든 주머니에 돈을 넣어 들고 그것을 흔들며 어른들 틈에 섞여 트럭을 탔다. 그 당시에는 트럭이 대중교통을 대신했다. 밀가루의 무게가 20kg이었지만 주변 어른들의 도움으로 밀가루를 사 올 수 있었다. 그때는 찐빵도 1원, 팥죽도 1원, 국수도 1원이었다.          




  팥앙금이 준비되면 따듯한 아랫목에서 이불을 덮고 하루 동안 발효된 밀가루 반죽을 조리대 위에 쏟는다. 노릿하게 부푼 반죽은 시큼한 냄새를 뿜어낸다. 질척한 모양이 잘 되었다. 마른 밀가루를 뿌려 치대고 둥글리는 할머니의 손은 빠르고 힘이 넘친다. 그러다가 찐빵을 만들 때는 새색시처럼 조신해진다. 한 덩이를 뚝 떼어 여섯 개의 작은 덩어리를 만든다. 엄지와 검지, 중지로 조물조물하여 동글 넓적한 반대기를 빚고 앙금 한 숟가락을 그 안에 담는다. 작은 구슬 여섯 개는 아기의 하얀 볼살 같다.      



  무거운 물건을 다루는 것은 할아버지(천수생, 79세)의 몫이다. 할아버지는 부엌의 뒷정리도 도맡아 하신다. 할아버지께서 갓 만든 단팥죽과 찐빵을 먼저 먹어보라고 하신다. 부드럽고 달콤한 단팥죽 맛에 나도 모르게 ‘와! 맛있다’라는 소리가 절로 났다. 감탄하는 나의 모습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허허허 함께 웃으신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온 보람이 있다. 이렇게 맛있는 단팥죽을 제일 처음 먹을 수 있다니, 행복하다.     


  “옛날에는 20년 전만 해도 단팥죽이라 안 하고 ‘전자이 한 그릇 주소’ 그랬다. 찰떡을 넣어서 먹었는데 이제는 비싸서 몬한다. 그래도 요래 요래 단팥죽에 찐빵을 뜯어 찍어 먹으면 맛있다. 이때 금방 금방 먹으면 맛있는데 쪄 놓고 또 데우고, 데우고 하면 맛이 몬해져. 그래 손님들이 옛날만 몬하다 그러는데, 내가 힘들어서 한꺼번에 몬한다.”     



  찐빵도 솥에서 바로 나온 것이 더욱 쫄깃하고 맛있다. 팥죽도 그러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할머니도 나이가 들었고 찐빵과 국수를 동시에 만드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새벽에 미리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할머니께서 잠을 쪼개어 자면서도, 힘들어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그 옛날 할머니의 찐빵을 먹고 자란 구룡포 초등학교의 학생들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찐빵이 생각나서 찾아온다는 머리가 허연 반가운 이들의 얼굴. 필자는 할머니의 지문 지워진 손을 꼭 잡아드렸다.      


  혹시 철규분식을 찾아가는 이가 있다면 주말이나 휴가철은 피하기를 권한다. 점심때 즈음이면 빵이 모두 팔려 낙심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긴 나무의자와 나무 식탁이 정겨운 철규분식. 비가 내리는 새벽이면 할머니께서 조리대에 앉아 찐빵을 만들던 등 굽은 뒷모습이 떠오른다. 오늘도 빵을 만드시겠지.       


     



[도움 주신 분]          

철규분식은 박상연(여, 77세) 할머니는 친정어머니께 배운 솜씨로 6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천수생(남, 79세)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배를 타셨다. 지금은 할머니를 도와주신다. 가게 이름은 친정어머니께서 아들 철규(할머니의 동생)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 이 글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지역N문화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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