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 지는 거리

설설 걸으며

by 세필

평소에 집을 나갈 일이 그리 많지가 않다. 수험생이라는 신분은 본질적으로 백수와 다를 바가 없어서, 집 안에서만 생활할 수 있는 특권을 유이하게 부여받은 직종이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집은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의 평안함을 선사하고, 이윽고 집 안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나태해질 권리를 부여한다. 누구나 함부로 누릴 수 없는, 오직 백수와 수험생에게만 부여된 이 권리를 난 벌써 삼 년도 더 넘게 누리고 있다. 그러나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삶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무래도 시간 개념의 상실이기 때문에,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쯤은 집을 나서서 나무에 꽃이 피었는지 이파리가 푸르게 났는지 울긋불긋한지 아니면 다 떨어져서 가지만 앙상한지를 확인하는 편이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건강에 좋다.


그런 전차로 적당히 몸을 닦고 커피나 좀 마시려고 아파트 단지를 나오니 일주일 전에는 도로변의 나무마다 하얗게 피어오른 이팝꽃들이 이제는 누렇게 시들어가는 중이었다. 카페 가는 길목에는 온통 누룽지로 튀겨진 쌀밥들이 바람 따라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꽃내음은 시들기 전보다도 더 진하고 향기롭더라. 생긴 것처럼 누룽지같이 구수한 냄새라도 풍겼으면 했으나 올해 들어 처음 맡는 내음에 그런 걸 따질 겨를은 없었을 것이다.


이팝나무 꽃은 5월에서 6월에 핀다고 한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 동네에선 4월에 피고 5월에 지는가. 그러고 보니 요사이 낮이 어지간히도 뜨거워져서 옷차림을 얇게 다니게 되었다. 인간과 달리 식물들은 훨씬 날씨 변화에 민감하다. 이제는 봄을 만끽할 새도 없이 여름이 다가왔음을 이팝나무가 먼저 몸으로 알려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느 때보다 빨리 찾아올 찜통더위에 줄기까지 익어버리기 전에 설익은 밥을 내어놓아 인간들에게 경고하는 이팝나무를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나무 밑을 거닐며 맡는 향기가 저 아스팔트 바닥에 수없이 눌어붙는 이팝꽃들의 단말마로 들리는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 이 글은 이팝의 꽃이 시들기 시작한 5월 첫 주의 어느 날에 쓴 글이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는 지금 6월 마지막 주, 누룽지 잔뜩 눌어붙은 그 거리는 뒤늦게 익은 버찌들이 후드득 떨어져 검은 빛 얼룩이 여기저기 물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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