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친구라는 것이 나이에 상관없는 정신적인 관계라고 가정할 때 나는 감히 '친구'라고 부르고 싶은 부모님 연배의 선생님을 한 분 알고 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을 몸으로 체득하신 것 같은 그분은 가끔 놀러 가면 두 끼의 밥을 주시고 상대에게 대접을 하기 바쁘신 분인데 배가 부르도록 먹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하루 반나절이 금방 간다.
친정 엄마와는 따로 만나지도, 속에 있는 이야기도 많이 나누지 않는 나로서는 그분을 만나면 엄마 생각이 가끔 난다. 동년배의 다른 여성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딸을 엄마가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이틀 쉬는 날이라서 남대문 시장을 같이 가려다가 내가 힘들까 봐 말았다는 말끝이 흐려지던 엄마를 기억한다.
'엄마'라는 단어만 나와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 단어가 조금 불편하다. 편치 않은 것인지 아니면 어딘가가 쑥스럽듯 낯이 간지러운 건지 아픈 것을 참는 건지 모르겠는 감정. 한구석이 점점 뜨거워지지만 그 달궈진 것을 꺼내놓을 수 없는 이상한 마음.
어릴 적 엄마가 사주지 않았던 미미인형을 나는 늦게까지도 기억해냈다. 아빠가 돈을 벌지 않기 때문에 조르면 안 된다고 엄마는 힘을 주어 이야기했고 이해 못할 나이었지만 법칙처럼 안에 담아두었다. 훗날 아이들을 데리고 간 풀장에서 돗자리를 펴고 이야기하다가 그것을 기억한다는 말을 꺼냈을 때에 엄마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놀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모를 때의 기억은 오히려 선명하다. 아팠던 아빠의 발작을 다섯 살 즈음에 처음 본 후로 나는 간호사 생활을 하면서 간질이 있는 환자가 내원하지 않을까 내내 두려움을 떨었다. 한 번은 정말 내원한 적이 있었는데 응급실에서 맞고 온 진정제의 효력이 내가 근무하는 시간 동안 다 되어 환자가 깨어날까 봐 마음을 졸였었다. 결혼과 동시에 병원이라는 직장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명명해놓고 아이들을 키우며 가정주부로 살았다. 삼 교대를 할 수 없고 가정을 돌보면서는 하기 힘든 일은 맞지만 그건 핑계였다.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친구가 일해볼 생각 없냐고 물을 때마다 그저 조용히 웃었다. 현실을 모르는 엄마는 이럴 거면 대학 학비가 아깝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는 지금 병원에서 일한다.
과거와 변한 게 없는 학교는 새 학기마다 부모님의 직업을 적어오게 한다. 아이들의 가정 조사서에 공란을 채우면서 주부라고 쓰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며 사는 것은 사실 아니었다. 집에서 무얼 하냐는 질문은 내 평생 들었던 질문들 중 가장 무례한 질문으로 손꼽고 있으며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은 '집에 있는 체질'이 못된다는 말을 간혹 내 마음에 내뱉고 가기도 했다. 답답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공존하면서 나는 일을 원하는 건지 사람들의 그런 이야기들이 듣기 싫어 원하는 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꿈이 있다는 말을 하기에는 팔자 좋은 소리로 여겨질 만큼 각박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진로라는 것은 결정하기보다는 결정되기도 한다. 엄마에게 등 떠밀려 꼬여버린 인생을 오래도록 원망했다. 제2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나는 경력보다는 나이만 쌓고 있는 것에 조바심을 느꼈다. 도서관을 종종 가기 시작하고 책을 읽는 나를 본 엄마는 진로를 잘못 '택해주었다'라고 말했다. 글을 쓰겠다는 꿈을 접고 엄마 뜻대로 다른 과를 진학하던 내 모습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엄마의 그런 사고방식은 내가 사십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지금의 나이가 되어서도 달라진 게 없었다. 난산에 시달리며 고생할 때도 자연분만을 해야 한다는 엄마의 고집에 남편은 수술 동의서를 앞에 놓고 난감해해야 했다.
엄마는 본질을 몰랐다. 인생은 사는 사람이 직접 택해야 하는 것이라는 걸. 엄마의 몸에서 나왔지만 우리는 각자 다른 길을 살고 있다는 것을. 그동안 엄마가 불편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다. 친구라고 부르고 싶은 엄마 또래의 그분이 삶아주는 비빔국수를 먹으며 나눈 대화는 숨겨둔 감정을 찬찬히 뜯어보게 해 주었다. 이런 마음이 솔직하다는 그분의 이야기에 이상하리만치 힘이 솟았다.
엄마를 부정하는 딸은 마음속에 죄책감을 쌓고 있었다. 친정식구 밖에 없다던가 결혼 후에는 친정이 최고라는 말들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부모님을 한 번도 의지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런 내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엄마가 도와주겠다는 김장도 악착같이 다른 사람에게 배워서 매년 혼자 담근다. 남편이 다된 자동차 배터리에 점프선을 연결할 때면 주의 깊게 보고 배운다. 무거운 것은 악착같이 스스로 들고 옮긴다. 세 번에 나누어 버리는 한이 있어도 쓰레기 분리수거를 결코 아이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혼자가 되는 법을 연습한다.
나의 생애 주기에 따른 과제는 모두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는 것. 처음에는 엄마에게 이제는 남편, 미래에는 자식들.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자신을 꽁꽁 묶고 있었다. 아빠 때문에 고생하며 지낸 결혼생활을 후회한 엄마는 나를 보며 버텨냈다. 나는 엄마의 인생을 저당 잡아 사는 듯한 채무자의 마음으로 살았다. 가족에게 기대는 법을 몰랐다.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꽁꽁 숨겨둔 케케묵은 감정들은 누군가 건드려주었을 때 치유가 된다. 대화를 하면서 점점 홀가분해졌고 글로 옮기고 있는 지금도 개운하다. 이 글을 보게 될 모르는 타인들도 자신의 꺼내놓지 못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자극 점이 되길 바란다. 자신만의 대나무밭은 누구나 하나씩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