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행을 한다. 노을의 끝자락이 길어진 계절에 해가 지기를 기다려 밖에 나간다. 어둠 속에서는 나무의 초록도 빛이 난다.
초저녁의 공원은 사람이 많다.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지나쳐 공원의 밖으로 걷고 또 걷는다. 환하게 불이 켜진 이층 고깃집에는 아직 저녁을 마치지 않은 사람들로 창가가 왁자하다.
아이들이 숙제를 마치고 저녁상을 차리고 치우는 나의 하루의 최종 과제가 끝나면 사람이 많은 쇼핑몰에 들어가 책도 구경하고 먹고 싶었던 땅콩 초콜릿도 사 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잠깐 사이의 생각은 선택을 저울질했고 얼마간의 지출보다는 밤길을 걷는 것을 택하게 했다. 그리고 시원한 밤바람은 나의 결정이 나쁘지 않음을 알려주었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까닭 모를 미소가 점점 입가에 피식피식 새어 나왔다.
공원을 벗어난 산책로에는 인적이 드물다.
야행을 하는 이유는 인적이 드문 길을 걸으며 노래를 듣기 위해서다. 걷기 딱 좋은 그루브 가득한 기타 연주가 깔린 곡이면 좋겠다. 베이스가 한껏 둥둥 강조된 곡도 괜찮다. 잔잔하면서도 가볍게 떠오르는 리듬감에 처음 집을 나섰을 때보다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걷다 보면 얼마 전 내린 비에 훌쩍 자란 벼도 보이고 누가 주인 일지 모를 넓은 텃밭도 만난다. 저 멀리 집집마다 불빛이 나란한 아파트 단지도 보인다. 저녁을 마치고 과일을 깎아 먹거나 퇴근 후 늦은 집안일을 처리하느라 세탁기가 바쁘게 돌아가는 집도 있겠지. 불빛 하나하나에 상상이 닿다가 코끝에 스치는 세제 냄새에 안도한다. 사는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라고 옥탑방에서 살았던 이십 대 시절에 생각했었다.
내가 나의 아이보다도 훨씬 어렸던 아이적에 이름을 쓰면 늘 이소영을 10소영이라고 쓰고는 했었다. 보다 못한 아빠는 가르쳐보려고 무던 노력하다가 화를 쏟아냈고 어렸던 나는 엉엉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일도 아닌 일에 그때의 나는 세상이 끝날 것처럼 슬펐다. 달래지지 않는 어린 딸을 데리고 아빠는 아파트 단지 상가 일층에 있던 쥐포 자판기 앞으로 갔고 그러면 여지없이 내 울음은 꼬리를 감추었다. 쥐포를 물고 아빠의 목에 올라타 집에 오던 길. 그것은 밤에 걷는 기분과 닮았다.
일상이 너무 일상적이라 답답하거나 까닭 없는 불안감에 마음 안쪽부터 죄어올 때면 이상하게도 걷는 것 만으로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때가 있다.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면 언제부터인가 밖에 나가 빠르게 걷다 오는 것을 택했다. 풀냄새 가득한 밤공기마저 더해지면 이 얼마나 유혹적이지 아니한가.
정적 속에서 걷는 한적함은 마음을 들뜨게 해 준다. 고민하고 있던 일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빨라지는 발걸음만큼 같은 속도로 요동치고 있는 심장 박동이 내가 야행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