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의 세계』- 마사 누스바움 편을 읽고
우리의 감정은 온전히 사적이지 않다.
사회의 가치가 반영된다.
내가 속한 공간, 집단을 기준으로 ‘우리’와 ‘너희’가 결정된다. 차별은 ‘너희’를 이상하고 두려운 시선으로 보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낯선 이들을 향한 두려움, 차별, 혐오는 이전부터 꾸준히 만연해왔지만 코로나 이후로 훨씬 눈에 잘 띄는 곳에서 관찰된다. 외국인 여럿이 우리나라에 입국했다는 사실 만으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이전에 이탈리아 지하철에서 폭행당한 동양인 기사를 보았거나, 이태원에서 클럽에 다녀간 원어민 교사가 코로나 확진받았다는 뉴스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외국인을 보고 ‘타국에 와서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의 출처를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출처를 아는 것이 마사 누스바움이 말한 '자기 성찰'의 시작이다.
코로나 초창기에 내가 중국인들을 향해 가졌던 편견과 적개심, 그리고 인종차별이 두려워 남은 평생 외국에 가지 못할 것 같은 암울함, 걱정에는 ‘사회의 가치가 반영’되어 있었다. 그 말은 즉, 같은 사회를 사는 이들의 감정이 모여 그 사회를 나타낸다는 말과 같다. ‘Black Lives Matter' 해시태그 운동이 진행되고 있을 시기에 아시아인을 폭행한 흑인을 거론하며, 흑인이 받는 차별을 ’ 당위적‘이라고 표현한 글이 있었다. 충격적 이게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해당 게시물에 대한 SNS ’ 좋아요 ‘를 말함)을 받은 이 글에선 ‘사랑의 정치'로 향하는 움직임 속에서도 혐오할 대상을 찾는 사회를 보여준다. 흑인에게 혐오를 투사한 집단을 비난해야 할 상황에서 언론에서 보도한 사건으로 흑인 전체를 일반화하여 그들에게 또 다른 혐오를 투사하는 것, 약한 집단끼리의 갈등은 결국 비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슈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분노를 특정 집단 탓으로 돌리는 언론에 감정이 ‘통제’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난 나름대로 상황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훈련이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부터의 세계』마사 누스바움 편을 읽고 뉴스, 책, 기사 등 어떤 것을 보아도 세상의 흐름을 ’인지 ‘하는 것에 그치는 나의 또 다른 문제를 발견했다. ’인지 ‘ 만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구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가라고 자문하는 내게, 마사 누스바움은 ’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각 분야 활동가들을 뒷받침하는 용감한 지지자가 되는 것‘이라며 구체적인 행동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전문가'가 아닌 '활동가'이다. 기후 위기를 예로 들자면, 구체적인 수치를 바탕으로 '더 이상 지구 평균 온도가 상승하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외치는 말을 지지하는 것보다는 그에 대한 실천을 실제 행동으로 하고 있는 이들을 지지하고 용기를 실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