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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남우 Nov 28. 2021

"우리 엄마 왜 피아노 배우는지 아세요?"


  항상 혼자 학원에 오던 윤지 씨가 오늘은 11살 딸을 데리고 왔다. 이름이 뭐냐고 묻자 아이는 세라요! 아빠가 어느 공주 이름이래요!라고 명랑하게 말했다. 거리 두기 수칙 때문에 한 연습실에 두 명 이상 있을 수 없어서 윤지 씨가 연습하는 동안 내가 세라의 말동무가 되어 주기로 했다. 


  소파에 앉아 할로윈 시즌에 어울리도록 칠판에 해골을 그리고 있었다. 내 옆에서 엄마랑 아빠는 몇 살이고 뭘 좋아하는지 등 개인 정보를 마구 남발하는 세라에게 그런 거 아무한테나 말하고 다니면 큰일 난다고 했다. 그건 그렇고 윤지 씨가 40대라는 걸 알고 나는 적잖게 놀랐다.

  "나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윤지 씨 대학생인 줄 알았어.“

  ”거짓말. 선생님 가식적인 분이시네요~“

  정말인데. 그것보다 요즘 11살은 가식적이라는 단어도 아는구나. 세라는 동네 슈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대출', '임대'라는 경제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요즘 애들 어지간히 똑똑하다.    

 

  이쯤 되면 세라가 내 말동무를 해줬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아이와 쉴새 없이 대화하면 어쩔 수 없이 느끼는 기빨림 때문에 슬슬 배고파지려 하는데, 문득 내 평소 삶에 초등학생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순간이 없다는 걸 알았다. 갑자기 세라와의 만남이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졌다. 나는 세라에게 궁금한 것들 막 물어보았다. 비대면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코로나 이전과 비교했을 때 학교생활은 어떤지… . 세라는 저학년만 대면 수업하고 자신은 고학년이라 비대면 수업을 받아서 싫다고 했다.     


  "선생님 그림 잘 그려요? 뭐 좋아해요?"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진 않지만 칠판에 그림 그릴 때마다 지나가는 수강생들이 ‘미술 전공하셨어요?’ 와 같이 한 마디씩 던지는 말들, 그리고 무릎을 쪼그려 앉아 칠판을 뚫어져라 관찰하고는 손으로 스윽 한 번 만져보는 그 반응들이 좋아서 그림 그리는 게 좋다고 했다. 뭐 좋아하냐는 질문에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많은 것들 중 '동물'이라고 말했다. 

  "진짜요? 저 수의사가 꿈이에요!“

  넌 꿈이 뭐니?'라는 어른들의 전형적인 물음을 거치지 않고 세라의 꿈을 들었다는 게 뿌듯했다. 세라는 수의사라는 직업적인 꿈 중에서도 다친 동물을 치료해 주고 싶다는 진짜 꿈이 있었다.       


  대화 주제가 빠르게 옮겨 다니는 아이답게 세라는 내 사원증을 보더니 선생님 얼굴이 사진이랑 달라요 라며 내 정곡을 찔렀다. 내가 반응을 하기도 전에 비밀 얘기해줄까요?라며 반에 자기가 짝사랑하는 남자아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직 화면으로밖에는 못 봤지만요."

  이게 바로 코로나 시대를 사는 아이들의 사랑인가. 애틋하고 슬펐지만 세라의 말투에서는 그러한 감정보다 언젠가 그를 실제로 보게 된다면 하는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선생님 그런데 우리 엄마 왜 피아노 배우는지 아세요?"

  윤지 씨가 처음 상담 받으러 학원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 두 분의 연주만이 울려 퍼지는 한가한 금요일 오전이었다. 그때 윤지씨는 재즈에 관심이 있다고 했었다.  

  "재즈에 관심이 많으시던데?" 

  "아니 그거 말고요." 

  마치 자신은 이유를 알고 있고 나를 테스트하는 식의 어조가 느껴졌다. 말해줄 거면 빨리 말해달라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세라가 말했다.      


  "있잖아요, 우리 엄마 옛날에 피아니스트 되고 싶었대요." 


  그 말을 듣고 세라는 단지 심심해서 윤지 씨와 같이 학원에 온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자신에게도 다친 동물을 치료해 주는 꿈이 있기에 꿈이 얼마나 소중한지 세라도 아는 것이다. 늦게나마 피아노를 즐기는 윤지 씨를 묵묵히 응원하는 세라의 마음이 느껴졌다. 

  꿈을 이루진 못해도 잃을 순 없다는 거. 나 또한 윤지씨를 보며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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