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남우 Jan 18. 2022

"구직 기준에 맞지 않으셔서 힘들 것 같아요 아버님."



  졸업 증명서가 필요했다. 정부 사이트에서 수수료 천 원 결제하고 도보 15분 거리에 있는 주민센터에 갔다. 굳이 걸음 할 필요 없이 학교 홈페이지에서 바로 출력할 수 있지만 종이 한 장이 삼천오백 원이나 하는 게 아까웠다. 몇 년 전만 해도 그 돈으로 붕어빵 일곱 개를 사 먹겠다며 억울하게 생각했겠지만, 세 개에 이천 원 하는 요즘이라 삼천오백 원에 언짢아하기도 애매했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번호표를 뽑고 앉아서 기다리는데 바로 앞에 '구직 상담'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사람들은 주민센터에 이런 서비스가 있는 걸 어떻게 알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해하고 있을 때, 마침 한 할아버지가 구직 상담 코너에 있는 직원에게 다가갔다. 

  “어. 르. 신. 일. 자. 리. 구. 하. 세. 요?" 

  앉아있던 사람들 절반 정도가 쳐다볼 정도로 직원이 글자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큰 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테이블 모서리를 반 바퀴 돌아 할아버지 바로 옆에 서서 아까보다 작은 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정정해 보이시는데 혹시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호칭이 어르신에서 선생님으로 바뀐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지 궁금했다.

  "내가 올해 85살이야." 

  할아버지가 말했다. 귀가 조금 안 좋으실 뿐 등산 가방을 메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걸어들어오신 할아버지는 정정하다는 직원의 말대로 굳세고 건강해 보였다.

  "아.. 그런데 저희가 연계해 드리는 회사는 만 75세까지만 희망하거든요, 아버님께선 그보다 연세가 많으시고 정정해 보이시나 귀가 조금 안 좋으신 것 같아요. 제가 이 정도로 가까이 와서 얘기하니까 잘 들리시나요?" 

  직원은 할아버지와 한 뼘 정도 거리를 두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정해 보이시지만 구직 기준에 맞지 않으셔서 힘들 것 같아요, 아버님."    

  

   어떤 회사가 만 80세 미만 노인을 채용하겠다고 발표한 기사를 보고 자비롭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가 노인과의 만남이 부재해서인지, 조부모님들이 모두 건강이 안 좋아서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안다고 착각하는) 80세는 힘이 없고 두뇌 회전도 느려서 일을 빠르게 처리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회사가 일할 기회를 주는 건 회사가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사회 연대에 이바지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85세 할아버지가 우직하게 서 있다. 단단한 바위처럼. 그런 그를 보니‘만 75세까지 지원 가능’이라는 조건이 순식간에 야박하게 느껴졌다.


   몇 마디 안 되는 대화에서 직원은 할아버지에게 '정정해 보인다'라는 말을 세 번이나 강조했다. 정정하지 않아서 일을 못 한다는데 정정해 보이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할아버지는 처음엔 나이 든 어르신이었다가, 선생님이었다가, 그리고 아버님으로 불리었다. 어르신이 선생님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에게서 자신의 아버지를 본 누군가라면 직원이 어떤 마음에서 아버님이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늙어가는 과정에 서 있으며 언젠가 신체적인 능력 때문에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낄 것이다. 죄송해서 어쩔 줄 모르는 직원의 어투와 표정이 연로한 노동자를 원하지 않는 회사가 아닌 85세 나이에 구직활동 상담소까지 찾아온 할아버지 편에 서 준 것 같아 내가 괜히 고마웠다. 


   일자리를 줄 수 없다는 말에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어차피 난 귀도 잘 안 들려.”

   이렇게 말한 뒤 문밖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디면서 할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무엇이 할아버지를 이곳으로 이끈 걸까. 그 쓸쓸하고도 강인한 뒷모습이 숙제라도 남긴 듯 나는 줄곧 그 이유를 골몰했다. 그것은 몇 주 지나 오랜만에 가족끼리 모여 육회에 소주를 먹던 날까지 이어졌다. 


   곧 정년 퇴임을 앞둔 아버지가 돈을 벌지 않고 집에만 있기엔 스스로가 너무 젊게 느껴진다며 대리운전기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그저 툭 한 번 던진 것에 지나지 않은 말에 어머니가 인상을 쓰며 반대하자, 아버지는 굉장히 서운해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몇 주 전 주민센터에서 본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연로한 노인이 무언가 하려는 건 단순히 돈을 벌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는 것보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는 일에 가깝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눈엔 눈물이 고여있었다. 왜 우리는 존재 자체가 쓸모일 수 없을까. 그보다 이 세상을 사는 다수의 아버지는 왜 안락을 거부하고 노동에서 해방되지 못할까. 나는 그들의 초조함과 사회의 일원이 되려는 부담엔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노인을 보호 대상이 아닌 쇠약한 육체를 가져 성장에 기여할 수 없는 쓸모없는 존재로 바라보는, 그들을 우리의 미래로 보지 않는 시선 말이다. 약자는 도태되지 않고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편안함을 누려야 할 때도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 엄마 왜 피아노 배우는지 아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