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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Nov 18. 2021

누가 친구일까?

단풍이 익어가는 계절,  우정이 익어가는 시간.

21.11.05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관계 속에서 내가 누구인가 알아간다. 새로운 곳에서는 내가 누구인가 설명하고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관계에 노출될 일이 적어진다. 최근 새로운 모임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나는 나를 다시 새롭게 설명해야 한다. 말을 하면서 자꾸 자신이 없어진다. 과거에 나를 설명했던 말들이 그대로 내 모습일까?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좀 다르지 않을까?



  10년 전에 보았던 페이스북과 지금 보는 페이스북은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마주치면 웃어주던 눈빛, 상냥한 말투, 옆자리에 앉아 생각을 나누던 그때와 어느덧 훌쩍 시간이 흘러 각자의 길을 따라 각자의 발자국을 내는 지금은 참 다르다. 오래 산 건 아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관계 또한 어떻게 익어가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오랜만에 글을 쓰면서 자괴감에 빠진다. 은유 작가는 <글쓰기의 최전선>이라는 책에서 글을 쓰는 것과 글을 쓰고 싶은 기분은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많이 힘들이지 않고 쓴 단편소설이 신춘문예 최종심의에 올랐다 떨어졌다. 습작 몇 편을 공모전에 내기도 했다. 벌써 몇 년 전 얘기다. 글을 쓸수록 영 내 글 같지가 않아서 몇 년을 쉬었다. 다시 내 목소리를 내려하니 정말 어렵다. 진짜 내 글을 쓰려하니 영 자신이 없다. 있는 척하지 않고 진짜 있는 것으로 쓰려하니 밑천이 다 보인다.



  파커 파머는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라는 책에서 영혼의 구멍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메우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멍을 되도록 피해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내겐 구멍이 너무도 많아서 피해 가지 못하고 푹푹 빠지는 것 같다. 글을 쓸수록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만 같다. 너무 괴롭고 눈이 침침해진다. 이건 내 길이 아닌 것 같다. 파커 파머는 같은 책에서 겨울이 가고 봄일 올 때 땅은 질퍽거리고 걸을 때마다 고지랑물이 튀어 옷은 더러워진다고 말한다. 차라리 눈 쌓인 황량한 겨울이 나았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봄이 시작될 때의 모습은 아름답지 않다고 말한다. 오랜 시간 굳어진 마음을 깨고 봄이 오려하는 것일까? 질퍽이는 얼음이 녹고 더러운 흙탕물이 마구 튀고 나면 새순이 보일까? 지금이 정말 그러한 시기라면 좋겠다.




 사르트르는 나와 함께 아주 천천히, 긴 산책을 했다. 한 번은 그가 내게 물었다.

 “이렇게 느리게 걷는 동반자가 있어서 지루하지 않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진심으로 말했다. 그가 걷고 있는 것으로도 나는 충분히 기뻤다.

  평생 연인으로 서로의 세계를 완벽히 공유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마지막 10년을 기록한 책 『작별의 의식』에 나오는 말이다. 느리게 함께 걷는 동반자가 있다는 건 참 즐거운 일이다. 단풍이 익어가듯 관계도 여물어 간다. 인생에는 한길도 뒤안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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