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찾아서, 가슴 뛰는 인생을 살아가길 응원한다.
컴컴한 새벽녘, 후드득 창문을 내리치는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무의식 중에도 강한 바람 소리와 빗소리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급하게 달려 나가 열어둔 창문을 모두 닫았다.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창문이 쉬이 닫히지 않을 정도였다. 아파트 고층에 살아서 평소에는 비가 와도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데, 이번엔 사방을 강타하는 낙하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침대 위에서 몸을 빙글빙글 돌려가며 정신없이 자고 있던 첫째도 갑자기 눈을 뜨더니 물었다.
"엄마, 이거 빗소리지? 엄청 많이 오나 봐."
첫째와 베란다로 나가 비가 오는 창밖을 바라봤다. 불이 꺼져 어두컴컴한 아파트들 사이 산책로에서 가로등만 간간히 빛을 내며 거센 빗줄기를 내비치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이 새벽에도 택배 차량인지 큰 트럭들과 택시 몇 대, 배달 오토바이 한 두대가 신호를 기다리는 게 보였다. 누군가의 수고로 얻을 수 있는 평안이라니, 미안함과 감사함이 공존했다.
번개까지 번쩍이자 첫째는 몸을 웅크리며 무섭다고 말했다. "무서워할 거 없어" 첫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잠자리에 눕혔다. 이불을 다 차낸 채 도토리 같이 작고 동그란 몸을 대자로 벌리고 자는 둘째를 다시 제자리에 눕히고 나도 이불속을 파고들었다.
비가 오면 길거리에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평소엔 붐비던 피트니스 센터도 출석 회원이 절반으로 줄고, 큰 사거리 신호등에서 초록불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복작함도 드문드문 우산을 들고 차량에서 튀는 빗물을 피해 서 있는 몇 사람으로 바뀐다. 우리 집에선 대로가 잘 보여서 때때로 베란다에 놔둔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구경한다. 아침 8시엔 출근하는 차량들, 30분 뒤엔 등교하는 학생들, 9시엔 유치원에 가는 아이들이 보인다. 잠시 뒤엔 늦은 출근을 하는 셔틀버스 행렬과 가게 문을 열러 가는 듯한 자영업자들이 뒤따르고, 아이들 등원을 마친 엄마들이 운동을 가고 나이 든 사람들의 손엔 장바구니 카트가 들린 채 분주해진다.
아이들이 하교하는 점심즈음부터 저녁까진 쉴 새 없이 학원 차량들이 움직인다. 수많은 노란 봉고와 대형 버스들이 아파트 단지안과 큰 대로를 드나들며 아이들을 실어 나른다. 그 광경은 밤 10시 즈음에 장관을 이루는데 왕복 12차선 도로가 학원을 마치고 하원하는 아이들의 학원 버스와 학부모들의 차량으로 가득 차서 차에서 내뿜는 비상등으로 눈이 부실 정도이다.
유치원생인 둘째를 9시쯤 재우고, 초등학생인 첫째를 열 시쯤 재우려 하면 학원을 마치고 아파트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아파트 동 사이마다 울려 퍼진다. 아파트 옆에 학원가가 있어 걸어서 다니는 아이들이 많은데 이 아이들을 제외하고도 그 많은 차량들이 아이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대로와 골목과 온갖 차를 댈만한 사이사이마다 가득 세워져 있는 것이다. 심지어 대형 학원버스에는 무임 승차하는 학생들도 있어 최근엔 아이디카드를 찍고 타는 시스템으로 바뀌는 추세라고 한다.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있다. 둘째는 이번주에, 첫째는 다음 주에 시작한다. 그나마 둘째는 유치원에서 방과 후 수업을 해서 돌봄이 가능하지만, 초등학생인 첫째는 어림도 없다. 돌봄이니 늘봄교실이니 하는 말들이 있지만 아직 내가 느끼는 체감은 전혀 없다. 주부인 내가 느끼는 방학은 답답함이지만, 맞벌이 부부가 느끼는 방학은 막막함이 아닐까? 아무리 돌봄이나 늘봄교실이 생겨도 먹거리나 교육에 대한 염려 때문에 사교육을 많이 시키는 이 동네에서는 여전히 학원으로 많이 빠질 것 같다.
여름 방학이 7월이라면 늦어도 6월 초부터 학원의 방학 특강 홍보는 시작되고 웬만한 반은 서둘러 마감이 된다. 미리 등록하면 학원비 선할인이 있는 경우도 있고, 대부분 선착순으로 모집이 끝나기 때문에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영어캠프나 과학캠프 등의 경우엔 이미 반년 전에 마감이 된다고 하니, 필요를 느껴 보내기보다 보내고 싶을 때 보내지 못할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미리 등록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우리 동네의 경우 일반 사립유치원은 월 4-50만 원 정도, 영어유치원이라 불리는 영어학원의 경우 100만 원 초반대에서 200만 원 후반대까지 있다고 들었다. 놀이학교라 불리는 유아대상 학원의 경우엔 100만 원 중반대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나도 주변 엄마들에게 들은 이야기라 지금은 더 올랐을 수도 있다. 여기에 각종 필요경비, 입학금이나 원복비, 현장학습비, 방과 후 특강, 생일파티 비용, 생일파티 답례비용 등이 더해지면 금액이 더 오르는데 방과 후 특강의 경우에도 선착순이나 추첨으로 금방 마감돼서 보내고 싶어도 못 보내고 점심 먹고 바로 하원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들었다. 보통 분기별로 돈을 선납하는 경우가 많아 정확한 월 금액 산출이 어렵다고 한다.
어린이집의 경우엔 유치원보다는 조금 더 저렴하다. 그래도 싸다고 할 순 없다. 보육 위주의 규모가 작은 가정어린이집은 월 10만 원 정도, 프로그램이 많은 민간어린이집은 20만 원 전후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입학금, 특강비, 생일파티비용, 특강 교재 비용 등이 수시로 추가된다. 게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낮잠이불을 들고 다니며 빨아야 하고, 매일 점심 도시락통과 물병까지 닦아 보내야 해서 할 일도 많다. 그래도 아기들이 많이 줄어들다 보니 폐원하는 곳이 늘고,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밥이 잘 나오는 등의 이유로 인기가 많은 어린이집은 몇 년씩 대기를 하다 보내야 하니 이마저도 감지덕지일 때가 많다. 나도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낼 때 2년 가까이 대기하다 원하는 곳으로 보낼 수 있었다.
아이의 나이가 올라갈수록 학원비용도 높아진다. 정확히 말하면 나이보다, 레벨에 따라 오른다고 한다. 유치원생인 둘째가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집 근처 기초 파닉스반을 알아보니 차량 운행 없이 월 50만 원부터 시작했다. 아마 여기에 교재비용과 영어 책, 테스트 비용, 하원 후 저녁에 집에 와서 온라인으로 들어야 하는 온라인 강의비용 등이 더해지면 월마다 비용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포기했다. 유치원생이 이 정도이니 초, 중, 고등학생은 말해 뭐 하랴.
그렇다면 학원가에 둘러싸인 아파트에 살면서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을까? 거의 안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말하면 첫째가 살짝 억울해할 수 있으니, 첫째를 위해 해명하자면 돈이 많이 드는 교육은 안 하고 있다. 우리 부부 생각에 큰돈을 들인다고 좋은 교육이라 할 수 없고, 아이들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걸 하게 해주는 게 진정한 행복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원을 다니면 아이가 가용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줄어들어 공부가 아닌 다른 활동은 거의 할 수 없게 된다. 가정 경제를 위협하면서까지 학원비로 큰돈을 지출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대부분의 공부는 나와 집에서 한다. 과목도, 문제집도 고민해서 아이가 직접 선정하고 아이가 먼저 푼 뒤에 내가 채점을 도와준다. 초등학교는 시험이 없기에 아이의 수준을 가늠하긴 어렵지만, 단원 평가나 학교에서 내주는 시험지는 대부분 100점을 맞고 집에서도 웬만한 문제집은 곧잘 푼다. 여건만 된다면, 초등학교 정도의 공부는 집 공부로 충분하지 않을까.
아이가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곳은 교과목보다는 특기활동이다. 말이 좋아 특기 활동이지 그냥 좋아하는 것을 한다. 3년째 방과 후 수업으로 컴퓨터와 코딩, 과학 실험, 코딩 로봇 등을 배우고 있다. 그것만 해도 하교 후의 웬만한 시간을 다 사용하는 데다가 집에 와서도 혼자 계속 이어서 사부작사부작 응용하고 변형시켜 보느라 바쁘다. 최근엔 워드로 동생에게 색칠북을 만들어 선물해 줬다. 특별히 잘하는 건 모르겠지만, 아이가 좋아해서 하는 활동이다. 학교에 방과 후 수업으로 다양하고 질 좋은 분야가 많이 있어서 참 감사하다.
첫째는 태권도도 좋아한다. 유일하게 다니는 학원인데 주 5일이 아니라 거의 6일이라 할 수 있다. 태권도 품새뿐만 아니라 유산소 운동, 타격 프로그램, 권술, 기계체조, 음악 줄넘기, 태권체조, 학교체육 등 다양하게 배운다. 토요일엔 에어바운스 파티, 1박 2일 캠프, 체험학습, 물총놀이, 영화관람 등 엄청난 유희를 제공해 준다. 방학엔 오전 특강이 추가되고, 신청자에 한해 돌봄 프로그램까지 있어서 공부나 숙제를 봐주고 점심도 준다. 최근엔 둘째도 태권도 학원 유치부 전용반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별명이 '아이언 맨'일 정도로 신나서 날아다닌단다. 첫째는 앞으로도 오래오래 매일 다니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아이 키우는 가정에게 태권도 학원이란 거의 육아 동반자라 할 수 있다.
둘째는 초등학교 부설 병설유치원에 다닌다. 병설은 놀기만 하는 곳이라는 오해가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내가 느끼는 병설은 초등 입학 준비뿐만 아니라 놀이 중심의 다양한 교육을 한다. 숲 체험, 코딩, 미술, 과학, 체육, 한글과 수, 영어, 독서 프로그램, 도예, 요리, 꼬마농부 등 검증되고 실력 있는 선생님 밑에서 안전하고 즐겁게 유아기를 누린다. 그런데 아이들이 넘쳐나는 우리 동네에서 병설은 인기가 없어서 겨우 5명의 아이들이 등록해 간신히 휴원을 피했다. 원래 7세가 다니는 곳이지만 추가모집으로 6세인 우리 아이도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유일하게 남자이자 6세인 우리 아이는 나이 상관없이 "매일 유치원 가고 싶어. 빨리 유치원 가고 싶어"를 외치며 행복한 시간을 향유 중이다.
병설의 단점은 등하원 셔틀버스가 없고, 방학이 길다는 점인데 최근엔 방학 중 돌봄이 생겨 학기중과 마찬가지로 운영을 한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곳은 아이들이 적어서 전체 방과 후 수업이 가능해 맞벌이가 아니어도 5시까지 돌봄을 제공한다. 맞벌이가 아닌 경우엔 점심만 먹고 집에 와야 하는 치명적 어려움이 발생하는데, 이건 사립 유치원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병설의 최대 장점은 교육비가 0원이다. 건강한 밥과 우수한 프로그램을 국가가 지원해 주는 비용으로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어떻게 이런 곳이 있을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놀라운 곳이다. 병설유치원은 집주소나 학구는 상관이 없어서 어떤 곳이든 보낼 수 있기에 우리 아이는 첫째가 다니는 학교 부설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곳으로 다니고 있다. 매일 자차로 등하원 하기가 번거롭긴 하지만 아이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할 수 있는 정도이다.
사실 학원가에서 학원을 보내지 않고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 심리적 압박이나 두려움이 크다. 그래서 나는 엄마 모임에 거의 나가지 않는다. 만나고 오면 불안하고 내 아이를 비교하게 되고 자꾸 잘 못하는 것 같다는 압박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해야 아이가 행복한 삶을 살리란 보장은 없다. 아침마다 아이가 일어나 아침을 먹고 물통을 챙겨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갈 때마다,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학교에 가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든든하게 제 몫을 하는 셈이고, 그 외의 것들은 선택사항이라 본다.
학원가에서 살아남기는 내가 아닌 아이의 몫이다.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지금보다 더 많이 해내고 앞서가야 한다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채찍질에 선동당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찾아서, 가슴 뛰는 인생을 살아가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