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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May 17. 2024

초등 4학년 남자아이는 무얼 하고 놀까?

알 수 없는 미래 보단 오늘이 행복한 아이


유난히 기념일이 많았던 4~5월이다. 국회의원 선거일, 어린이날, 어버이날, 석가탄신일 거기에 남편 회사 창립기념일과 건강검진, 시아버지 생신, 아이 두 명의 현장체험학습 등 매주 챙겨야 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빨간 날은 쉴 수 있어 좋지만, 이 많은 빨간 날 자유는 없기에 피곤함의 연속이기도 했다. 차라리 아이들이 학교와 유치원에 가는 까만 날에 이르러야 밀린 집안일도 해결하고, 한숨 돌릴 수 있다.


  어제도 빨간 날이었다. 아이들이 바다에 가고 싶어 했지만 휴일마다 비가 오고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 이번에도 가지 못했다. 아이들의 입이 댓 발 나왔고, 좋아하는 곤충이라도 잡으러 가고 싶단 요청에 못 이겨 아침 일찍 집 근처 대학교를 끼고 둘레길처럼 이어진 등산로로 나섰다. 오후에 비 예보가 있었기에 서둘러 걸을 수 있는 만큼 걷고 오고 싶었는데 아이들은 입구부터 세월아 네월아 느리 적거린다. 한 손엔 채집통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오리 집게를 들고선 무당벌레 유충, 거미, 풍뎅이, 개미, 송충이, 콩벌레 등 보이는 족족 관찰하고 이에 대해 얘기를 나누느라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첫째는 자기가 알고 있는 곤충에 대해 얘기하느라 여념이 없고, 둘째는 형아를 따라다니며 주워듣느라 신났다.

  "우리나라에 거미 종류가 600여 종이 넘는데 거미줄을 뿜는 거미보다 거미줄을 치지 않는 거미의 종류가 더 많대. 지금 우리가 잡은 얘도 거미줄을 치지 않고 사냥하는 애야."


  "꽃동아, 거기 송충이다. 걔는 발로 밟아 버려! 걔는 나쁜 짓만 하는 해충이야!"


  "여기 바닥에 장수풍뎅이 암컷이 누군가에게 밟혀 죽었네. 성충이 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너무 불쌍하다."


  뒤에 오던 사람들이 계속 우리를 앞지르고, 작은 강아지도 우리보다 빨리 가는데 우리 가족만 멈춰 서서 온갖 벌레를 찾아다닌다. 덕분에 둘레길을 걸어 호수 공원까지 찍고 오려던 계획은 전면 수정되어 산 초입에서만 몇 시간을 보냈다. 아이 둘을 낳고, 첫째가 만 9세가 된 지금까지 이런 일은 너무 흔해서 오히려 계획대로 된 적이 거의 없기에 이번에도 아쉽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밖에. 부모에게 빨간 날은 아이들을 위한 날이라 비록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계획을 세우면서도 그마저도 되지 않을 때가 허다하다. 그로 인해 아이들이 행복하고 좋아한다면 이 또한 목적은 이룬 셈이다.


  첫째는 벌써 초등학교 4학년이고, 둘째는 유치원에 다니는 데 둘 다 생물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집에서 별의별 생물을 다 키워봤다. 지금은 장수풍뎅이와 달팽이, 무당벌레 유충을 애지중지 키우고 있다. 나는 곤충이라면 다 벌레로 보이고 기피 대상이었지만, 아이들이 하도 좋아하다 보니 이젠 나도 곤충을 발견하면 아이들에게 얼른 보라고 알려주며 아이들의 취미에 동참하기에 이르렀다. 얘들이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나 싶다가도 미래가 아닌, 현재가 행복하고 기쁘다면 이걸로 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슴 설레는 일이 많고 성취감이 가득한 사람은 뭘 해도 될 사람 아닐까?




  관심 분야가 다양한 첫째는 곤충 외에도 노는 데 진심이다. 집에서는 어린 동생과 노느라 맞춰주고 양보하는 게 많은데, 친구와 놀 때는 무얼 하고 노는지 궁금했다. 엄마가 없는 데서, 또래와 어울려 마음껏 놀 수 있을 때 과연 무얼 하고 놀까? 첫째는 학교 수업이 끝난 뒤, 방과 후 수업이나 친구들이 학원에 가기 전 자투리 시간을 맞춰 같이 논다. 초등학교 4학년 남자아이들이 모이면 무얼 하고 노는지 궁금해서 매번 오늘은 무얼 했는지 물어보는데, 다행히 아직까진 첫째가 세세하게 대답해 준다.


  첫째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9반까지 있고 점심시간이 끝난 뒤 바로 하교라서 반마다 하교시간이 다르다. 첫째와 가장 친한 친구와는 반이 달라서 하교 시간이 다른데도 거의 매일 같이 논다. 휴대폰도, 손목시계도 없는 데다가 각자 다음 일정이 빠듯해 놀 수 있는 시간이 20분에서 길어야 1시간가량 밖에 되지 않지만 뜻이 있는데 길이 생기는 법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 모든 조건을 뛰어넘어 논다. 초등학교가 아파트 단지 안에 있어 서로의 집이 가까운 데다가 그 친구의 엄마도, 나도 가정 주부이기에 아이의 하교 시간에는 대부분 집에 있는데 뭐든지 주도적이고 열정적인 우리 첫째는 휴대폰이 없는 대신 아파트 1층의 공동현관 초인종을 적극 활용한다.


"엄마, 오늘 시우네 가서 30분 놀다가 방과 후 수업 시간 맞춰서 다시 학교 갈게요."


  우선 우리 집 1층 공동현관 초인종을 이용해 나에게 허락받고 부지런히 친구네로 가서 초인종을 누른다.


"안녕하세요. 저 첫둥인데요, 시우 있어요? 같이 놀아도 돼요?"


  첫둥이의 말을 빌리자면, 시우는 똑똑하고 착한데 몸이 약해 학교에 자주 빠지는 친구이다. 정이 많은 첫둥이는 시우 생일이 다가오기 한 달 전부터 선물을 섬세하게 여러 가지 준비했고, 편지까지 썼는데 정작 시우가 아파서 학교에 못 오자 나중에 시우 엄마를 통해 선물을 전달하기도 했다. 시우 엄마는 시우가 몸이 약하고 쑥스러움이 많아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는데 첫둥이 덕분에 학교에 적응하고 잘 지내게 됐다며 첫둥이를 반갑게 맞이해 준다. 시우를 우리 집에 데려오기도 하지만, 첫둥이가 갈 때가 훨씬 더 많기에 나 또한 시우 엄마에게 고마워 과일이나 간식을 첫둥이 손에 들려 보내기도 하고 기프티콘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한다.


  첫둥이는 친구 집이나 우리 집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무리를 이뤄 다양한 놀이를 한다. 대부분 다음 일정 때문에 놀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짧지만 종이접기, 보드게임, 코딩으로 만든 게임, 코딩 로봇 조립 후 대결 등을 하고 집 안에서 숨바꼭질까지 하고 논다. 밖에서 노는 날엔 축구를 하거나 자기들 눈에 멋져 보이는 돌멩이와 나뭇가지를 모으기도 하고, 비 오는 날엔 신발이 진흙투성이가 되도록 모래 바닥에 무언가를 잔뜩 그리고 만들어 놓고 온다. 너무 신나게 놀아서 저녁에 발이 아프다며 찜질을 하기도 하고, 신발 높이 던지기를 해서 신발을 놀이터 정자 지붕 위에 올려놓고 한 발로 절뚝이며 집에 온 날도 있었다.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도 아니고, 수도권의 학군지로 유명한 초등학교에서 학원에도 다니지 않는 우리 첫둥이는 친구들이 학원과 학원에 가는 비는 사이를 찾아다니며 땀을 뻘뻘 흘리고 햇볕에 얼굴을 까맣게 그을리며 노는 것이다.


  놀이터가 있는 공원에 갈 때는 같이 나눠먹을 간식도 집에서 챙겨가는데 어떤 날은 아이스크림, 어떤 날은 과자나 음료, 과일과 떡 등 간식통을 뒤져 가방에 담고 심지어 나눠마실 컵과 접시까지 준비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놀이터에서 모래 바닥을 팔 장난감 삽과 물총, 간식까지 챙겨서 어린이용 카트에 넣어 끌고 갔다가 시간 맞춰 집에 들어와 공부를 한다. 놀기 위해, 다음을 또 기약하기 위해 시간을 지키고 자기 할 일을 하는 어린이라니, 너무 어린이스러워 경이로울 지경이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약속을 잡고, 휴대폰도 시계도 없는데 신나게 놀다가 시간을 맞춰 집으로 돌아오는 걸 보면 얼마나 놀라운지 모른다.

파고 파고 또 파고. 왜 파는 진 모르겠지만 계속 판다.




  해맑고 순수한 아이를 보면 귀엽기도, 입이 떡 벌어지기도, 뒷골이 당기기도 한다. 친구들은 열심히 레벨테스를 받으며 화려한 학원 이름이 적힌 가방을 메고 쉬지 않고 공부하는 것 같은데, 우리 아이는 카트에 모래삽을 넣어 끌고 다니며 쉬지 않고 논다. 이 친구가 학원에 가면 학원에 다녀온 다른 친구랑, 다른 친구가 다음 학원에 가면 학원을 마치고 그다음 학원 버스를 기다리는 또 다른 친구랑 논다. 이 친구 저 친구 다 없으면 동생들이랑도 논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아무것도 없어도, 아무도 없어도 어떻게든 재밌는 것을 찾아내고 만들어내서 노는 우리 첫둥이. 흥미 있게 노는 걸로 치면 전국 1등 할 것 같은 우리 첫둥이다.


  그럼에도 아이에 대한 나의 가장 큰 감정은 '존중'이다. 나의 자녀로 찾아온 이 아이의 취향과 성향을 존중한다. 생물과 코딩, 조립과 만들기를 좋아하고 사고력 수학 문제집을 새로 사주면 좋아서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 좋아하는 게 많아서 방과 후 수업을 주 5일, 4과목이나 듣고 그것도 시간이 모자라 어떻게든 줄여서 듣는 게 그 정도인 데다가 태권도는 매일 1시간씩 빠지지 않고 가야 하고, 수영과 축구를 사랑하며 책 읽기를 너무 좋아해서 가장 좋아하는 책이 오래 읽을 수 있는 '두꺼운 책'이라는 아이. 엄마가 힘들까 봐 무거운 짐은 죄다 들어주고 언제나 타인의 마음을 먼저 고려하며 양보가 몸에 배어있는 첫둥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아이의 행복이 나에게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고 나면 한발 떨어져 아이가 누리는 기쁨을 공유하게 된다. 오늘은 어떤 친구를 만났는지, 무엇을 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잘거리고 급식으로 나온 미니 붕어빵이 너무 맛있어서 6번이나 받아먹고 또 먹으려니까 조리사님이 "이제 너부터 OUT! 이제 없어"라고 얘기해서 친구는 8번 먹었는데 자기는 6번이라고 입이 뾰로통하게 나왔다는 말도 모두 다 소중한 보물같이 느껴진다.

첫둥이가 요즘 즐겨읽는 책들


  배우 박보영과 연우진이 주연으로 나오는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내가 애정하는 드라마이다. 간호사 '다은'(박보영 역)이 정신병동 안에서 처음 근무하면서 마음 시린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을 접한다. 마음에 생기는 병과 정신 병동에 입원하는 환자들에 대한 편견을 없애주고, 누구나 그럴 수 있겠다는 공감과 잔잔한 위로가 있는 따뜻한 드라마이다. '다은' 또한 입원 병동의 환자들에 대해 편견을 갖고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는데, 점차 보고 듣고 지내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모든 병은 상실에서 온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거나 자기 자신을 잃었거나 또는 행복한 순간들을 잃었거나. 그럴 때 우리는 이제 너무나 뻔해서 얘기하는 사람조차 낡아 보이는 '희망'이라는 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진다. 그 뻔한 희망, 그 뻔한 희망을 찾기 위해 우리들은 여기에 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대해 고민할 때,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몰라 고민이 깊었다. 도대체 가슴 뛰는 일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 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때까진 그저 주어진 것에 열심히 하면 점수가 나오고 그 점수에 따라 일정한 위치에 도달하고 그게 목표인 것처럼 살아왔는데, 막상 진짜 사회로 나가려니 선택지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세상이 너무 넓어서 당황스러웠다. 좋아하는 일이 '글'이란 걸 알고 허둥지둥 대학원을 관련 학과로 진급했는데, 막상 가보니 어릴 때부터 관련 분야에서 마르고 닳도록 글을 써 온 이미 자기들만의 리그를 가진 사람들을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이란!


  어릴 때부터 스스로 혹은 주변인들로부터 '제한'을 많이 받았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된다. 마치 인생에 정해진 답이 있는 것처럼 그 길을 벗어나면 누락자가 되는 것처럼. 내가 어른이 되니 그때 들었던 말들 중 반만 맞는 말이란 걸 알겠다. 내가 어릴 때가 디지털 시대라면 이제는 인공 지능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직업이 사라지고 전혀 모르던 직업들이 생겨날 것이라는 데, 드넓은 우주에서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서 겨우 경험하고 살아온 만큼밖에 모르는 내가 아이의 진로를 알 리가 있나.


  커서 뭐가 될지 모르는 이 작은 아이가, 내 판단에 제한받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소망한다. 꼭 커서 뭐가 되는 걸 꿈꾸지 않더라도 오늘이 행복한 사람이면 족하다. 박완서 작가는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라는 에세이에서 아이들이 느끼는 힘듦이 비단 공부 때문만이 아니라 부모의 지나친 극성 탓이라고 꼬집는다.


"아이들의 책가방은 무겁다. 그러나 단순한 책가방의 무게만으로 한창나이의 아이들의 어깨가 그렇게 축 처진 것일까? 부모들의 지나친 사랑, 지나친 극성이 책가방의 몇 배의 무게로 아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건 아닐지."


  작가는 아이들에 대한 희망사항에 대해선 이렇게 열거한다.


"아이들은 예쁘다. 특히 내 애들은. 아이들에게 과도한 욕심을 안 내고 바라볼수록 예쁘다. 제일 예쁜 건 아이들 다운 애다. 그다음은 공부 잘하는 애지만 약은 애는 싫다. 차라리 우직하길 바란다. 활발한 건 좋지만 되바라진 애 또한 싫다. 특히 교육은 따로 못 시켰지만 애들이 자라면서 자연히 음악, 미술, 문학 같은 걸 이해하고 거기 깊은 애정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놀기 대장 우리 아이가 '예쁜'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감기에 걸려도 약 한 번 안 먹고 이겨내는 단단한 힘으로 신나게 놀고 마음껏 꿈꾸며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라는 드라마에서 '다은'이 얘기한 그 뻔한 희망을 몸에 지닌 사람, 자기 삶을 사랑하는 희망 그 자체이기를 바란다.

방과후 수업 가는 길. 로봇 코딩이라 재료가 많고 무거워서 카트를 끌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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