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돋을볕 Jul 09. 2024

우리 집 일치기 대장님

"엄마, 물건보다 생명이 소중하지?"

우리 집에 사는 일치기 대장님은 조용하면 일치고 있다. 얼마나 고루고루 일을 치는지 그 성실함과 기발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지난 저녁에도 바스락바스락 뭘 만져대더니 조용히 다가와 묻는다.


  "엄마, 물건보다 생명이 소중하지?"

일치기 대장이 이런 말을 할 때면 뭔가 일을 쳤다는 얘기다. 물건이 부서졌으나 자신은 무사하다는 뜻이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일까 물어보니 자신은 억울하다는 듯 대답한다.

  "내가 설거지하려고 수도꼭지를 잡아당겼는데 그냥 툭하고 빠졌어."

조용하더니 혼자 설거지를 하려고 했구나. 물바다가 된 것도 아니고, 접시가 깨진 것도 아니고 수도꼭지가 빠졌다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뺐다 꼈다 하면서 길이를 조절하는 수전이니 말이다. 그런데 일치기 대장이 등 뒤에서 꺼낸 수도꼭지의 헤드가 가관이었다. 정말 부서졌다. 똑- 하고.


  놀라서 부엌으로 달려가보니 싱크대 수전이 박살 나있었다. 헤드가 없는 수전은 물을 트니 사방으로 거친 물살을 내뿜는다. 냉큼 잠그고 남편을 불렀다. 상황을 파악한 남편도 입을 다물지 못한다. 나와 남편의 안색을 살피던 일치기 대장이 다시 아빠의 눈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마주하며 물어본다.


  "아빠, 물건보다 생명이 소중하지? 물건은 다시 사면되는데, 생명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다행히 나는 안 다쳤어."

일치기 대장의 말에 남편의 황망했던 눈동자가 기다랗게 바뀌며 웃음을 터뜨린다.

  "물건보다 생명이 소중하냐고? 하하. 당연하지. 진짜 화를 낼 수가 없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하지?"

남편은 나를 보며 신기하다는 듯 묻는다.


  시간은 주말의 저녁이고, 기술자를 부르기엔 늦었다. 근처 철물점에 전화를 돌려보았지만 다 문을 닫았다. 장거리 이동으로 우린 모두 지쳐있었지만 상황이 다급했다. 우리는 유튜브를 검색했다. 쉽게 설명된 여러 영상중 하나를 따라 하며 수전을 개봉했다. 집이 물바다가 되진 않을까, 갑자기 물이 솟구치진 않을까, 그나마 남아있던 부분까지 망가지진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안 할 수도 없었다. 당장 내일 아침에 써야 할 그릇들이 설거지를 외치며 쌓여 있었다.


  남편은 젓가락과 손톱과 드라이버와 모든 할 수 있는 수단을 동원해 기적적으로 수전을 고쳤다. 다행히 헤드가 부러진 게 아니라 빠진 거라서 힘겹게 다시 이을 수 있었다. 유튜브가 없던 시절엔 어떻게 집안의 시설을 고쳤을지 가늠도 안된다. 유튜브 덕분에 수전도 고치고, 매립 등도 갈고, 콘센트도 바꿨다. 그리고 가정의 평화도 지켰다.


  일치기 대장님은 어쩔 때 보면 직립보행하며 말할 수 있는 강아지 같다. 아니, 어쩌면 대장님보다 더 똑똑한 강아지도 있을 수 있겠다. 유치원생 일치기 대장님은 호기심이 넘치고, 무엇이든 직접 해봐야 성미가 풀리며 무엇보다 엄마, 아빠가 하는 건 자기도 해야 한다. 조용히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다 따라 한다. 제발 다른 데 가서 놀라고 해도 옆에 딱 붙어서 설거지를 하다가 옷이 다 젖고 바닥이 물바다가 된다. 제대로 닦을 리 없기 때문에 대장님 손을 거쳐간 그릇들은 결국 다시 닦아야 한다.

설거지할 때 손 다칠까봐 결국 어린이용 고무장갑까지 사줬다

  내가 요리를 하고 있으면 어느새 다가와 어린이용 칼을 들고 덤빈다. 어린이용 칼은 모양만 칼을 흉내 냈을 뿐이지 전혀 날카롭지 않기 때문에, 식재료가 다 뭉개지고 바닥에 떨어지고 난리다. 인덕션 앞에서 잠깐 자리를 비우면 의자를 끌고 와 올라서서 프라이팬 안에 담긴 음식을 내 흉내를 내며 뒤적거려서 사방에 음식물을 튕긴다.

대장님의 요리교실


  속옷을 손 빨래 하는 걸 보더니 빨래통이 담긴 옷들을 몽땅 꺼내 화장실 바닥에서 빨래를 빙자한 대환장 파티를 벌여놓았다. 형이 집에서 장수풍뎅이를 키우는 걸 보더니 자기도 뭔가를 키워야겠다며 달팽이, 개미, 콩벌레 등을 잔뜩 잡아 왔다. 날아다니는 무당벌레는 절대 안 된다고 했지만, 언제 밀반입을 했는지 집 안에서 무당벌레가 여러 마리 목격되었고, 집 안의 식물을 다 갉아먹고 알까지 낳아 놓았다. 형이 학교 수행평가로 집에서 강낭콩을 키우자, 자기도 식물을 키우겠다며 밖에서 풀을 캐와서 새로 산 양치컵에 심어놓았다.

풀이 심긴 새 양치컵


  여름이라 주방에 초파리가 꼬였다. 인터넷을 찾아보고 천연 초파리 퇴치제를 만들어 뿌렸다. 가글액인 리스테린과 소독약인 에탄올을 1:1로 섞어서 뿌리면 되는데 효과가 좋았다. 음식물 쓰레기 봉지나 설거지 이후 하수구 쪽에 수시로 퇴치제를 넣은 스프레이를 뿌렸다. 우리 집엔 '낮말은 첫둥이가, 밤말은 막둥이가 듣는다'는 말이 있다. 남편과 나의 언행을 안 보는 것 같아도 두 아이가 다 지켜보고 있다는 뜻인데, 이번에도 막둥이 대장님은 눈여겨보고 있었다. 갑자기 집 안이 매운 냄새로 가득 차며 사방에 파란 얼룩이 묻어 있었다. 대장님이 내가 만들어 쓰던 초파리 퇴치 스프레이를 집 사방에 뿌리고 다니고 있었다. 덕분에 집안 창문을 활짝 열고, 구석구석 걸레질을 해야 했다.


  한 번은 달팽이를 백 마리 가까이 잡아서 페트병에 넣어 온 적도 있었다. 시골에 갔다 밤에 차를 타고 올라오는 일정이라 일치기 대장님은 페트병을 손에 쥔 채로 잠이 들었다. 대장님은 차 안에서 잠이 들어도 카시트의 안전벨트가 꼭 붙잡고 있어서 상관없지만, 페트병 속 달팽이들은 다르다. 달팽이들이 숨을 쉬어야 한다며 뚜껑을 열고 오다가 대장님 손에 힘이 풀리며 페트병이 차 속에서 나뒹굴었다. 남편과 나는 이를 모르고 집에 도착해서 대장님만 안아서 침대에 눕혔다. 다음 날 아침, 차를 탔을 땐 페트병 속에서 나온 달팽이 수십 마리가 차의 어둡고 구석진 곳을 찾아 대 이동을 한 뒤였다. 남편은 회사에 가고, 아이들은 학교와 유치원에 간 터라 나 홀로 울면서 달팽이 한 마리, 한 마리를 다 떼어내 풀 숲에 보내줘야 했다.


대장님의 전문 장비들


  일치기 대장님의 일치기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아마 초등학생이 되고, 좀 더 클 때까지 몇 년은 더 남았을 것이다. 그래도 귀여워서 봐준다, 일치기 대장님. 네 말대로 생명이 물건보다 소중하니까.


옷장 속의 이불을 다 꺼내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이전 04화 초등 4학년 남자아이는 무얼 하고 놀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