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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Oct 04. 2024

그는 자연인이다

놀이공원보다 놀이터가 더 좋은 아이들

긴 추석 연휴에 이어 징검다리 연휴가 따라붙었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양육자는 공감할 텐데 이렇게 연휴가 길면 제정신을 차리기가 어렵다. 오늘은 뭐 하고 놀아주나, 오늘은 뭐 먹이나 고민이 크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는 친정인 시골에서 밤 따기와 도토리 줍기, 풀 베서 염소 밥 주기, 근처 바닷가에서 게와 작은 물고기 등을 잡으며 보냈다. 그런데 징검다리 연휴엔 무얼 하나? 남편과 상의하는데 언제나 우리의 생각보다 앞서가는 열 살 첫째는 이미 다 계획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계획이 있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이번 연휴는 9월 말의 주말부터 시작해서 10월 1일인 화요일에 국군의 날 기념 임시 공휴일, 10월 3일 목요일에 개천절로 또 공휴일에다가 하루 뒤면 또 주말이다. 지난 주말엔 애니메이션 영화 시사회에 당첨되어 아이들과 영화관에 다녀왔다. 백화점에 있는 영화관이었는데, 나와 둘이 가끔 영화를 보러 갔던 첫째는 익숙하게 즐겼으나 흔히 말하는 코로나 베이비로 영화관에 처음 간 둘째 꼬맹이는 신이 나서 하루 종일 흥분 상태였다. 영화 관람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백화점을 구경하며 레고 샵, 닌텐도 체험장 등에서 시간을 보내고 영화 관람 후에는 무료 주차 시간도 채울 겸 지하 푸드코트에서 이것저것 간식거리를 사주었더니 이후로도 매일 영화관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다. 무엇보다 영화로 보았던 캐릭터의 장난감을 사달라고 시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줘” 시즌을 지나는 중인 다섯살 둘째. 글씨도 모르는데 자꾸 글자를 그려서 편지를 써온다.


  10월 1일엔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흐리고 비가 오길래 집 근처 수영장에 가자고 했더니 첫째가 상의 래시가드를 벗어야 해서 친구들을 만날까 봐 완강히 거부했다. 그 전날 학교에서 생존수영도 하고 온 터라 이미 첫째는 물놀이를 하고 온 상태기도 했다. 결국 지난 주말 영화관에 갔던 여파로 집에서 같이 영화를 보았다. 그래봤자 하루 24시간 중 100분만 채웠기에 나머지 시간을 버텨야 했다. 지난달에 도자기 체험 행사에 갔다가 흙놀이에 푹 빠진 아이들을 위해 미리 점토 8kg를 주문해 놓은 게 있어, 아이들은 집에 있는 각종 재료들을 더해 작품을 만들었다.

점토로 탱크와 자화상 등을 만들어 집에 전시했다.


  또다시 다가온 10월 3일 개천절엔 남편과 내가 어딘가 가고 싶었다. 귀하고 희귀한 청명한 가을 날씨를 누리길 원했다. 에버랜드를 갈까, 박물관에 갈까, 생태원에 갈까, 재밌는 행사를 하는 공원에 찾아갈까 다양한 후보지를 생각하며 머리를 맞댔다. 미리 준비해 둔 유부초밥과 김밥 재료들, 과일과 간식을 챙겨 소풍을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우리보다 더 부푼 생각으로 새벽 6시 30분부터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난 첫째는 당일치의 공부를 후딱 해치웠다. 냉동실에서 만두와 미니 핫도그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려먹고 우유를 꺼내 마시며, 자고 있는 동생도 조용히 깨워 먹였다. 내가 일어났을 땐 이미 공부를 거의 마쳐가고 있는 상태였는데, 아이는 공부를 일찍 끝낸 것에 성취감을 느끼며 신나게 춤을 춰대더니 이제 하루 종일 놀 거라며 신나 했다. 휴일에는 평일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하루를 길게 살아내는 저 방법은, 알려주지 않아도 기똥차게 알아서 터득한다. 덕분에 부모도 휴일에도 낮잠은 금물, 쌀쌀한 새벽 공기를 맞으며 아침을 맞는다.


  "꿀동아, 오늘은 차 타고 밖에 나가서 놀자. 넓은 공원 가서 자전거 타든 지, 행사하는데 가서 놀다 오자. 아니면 동물 먹이 주기 체험이나 곤충 박물관 가든지."


내 제안에 첫째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동물 먹이 주기 체험은 돈 내고 조그만 당근 하나 줄텐데 그런 건 시골 가면 훨씬 많이 마음껏 줄 수 있고, 곤충도 숲에 가면 엄청 많잖아. 자전거는 다음에 타고 오늘은 집 앞에 놀이터 가서 땅 팔래."


나는 남편과 마주 보고 아연실색했다.

  "집 앞에 놀이터는 어제도 가고, 그저께도 가고 맨날 가는데 오늘도 간다고? 모처럼 어디 놀러 가서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오자. 사촌 동생네도 같이 놀재."


첫째는 다시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도 갈래. 집 앞에 놀이터 가서 땅 파는데 훨씬 재밌어. 맨날 해도 맨날 좋아. 동생한테 연락해서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해. 걔도 땅 엄청 잘 파니까 같이 파면 돼."


  이번엔 남편이 오늘은 좀 쉬고 싶다며, 집에 초대하기엔 청소할 힘이 없다고 하니까 첫째는 걱정하지 말라며 팔을 걷어붙였다. 둘째에게 뭐라고 속닥거리더니 둘이 나서서 집을 치우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자신들의 방과 거실, 안방 이부자리까지 치우며 걱정하지 말란다.


  결국 놀이동산도 축제 구경도, 피크닉도 마다한 우리 아이들은 사촌 동생네를 집으로 불러 모래놀이 삽과 장난감 비행기, 비눗방울 등을 챙겨 집 앞 공원으로 갔다. 1년 365일 중 300일 이상은 찾아가는 집 앞 공원, 놀이터에서 하루 종일 땅을 팠다. 땅을 파는 우리 아이들을 보고 지나가던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사라지고, 산책 나온 사람들이 신기한 듯 껄껄 웃으며 사진을 찍고 가고 중천에 떠 있던 해가 뉘엿뉘엿 떨어져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때까지 아이들은 땅을 팠다.


  운동화도 양말도 벗어던지고 맨발로 흙을 밟으며 길을 만들고 산을 쌓고 구덩이를 팠다. 습한 공원 구석에서 이끼를 퍼다가 벨벳 이불처럼 파낸 길 위에 덮고, 커다란 나뭇가지를 구해와 성 가운데에 꽂았다. 깃발대신 나뭇가지 끝에는 넓적한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걸렸다. 공원 수돗가에서 물을 떠다가 모래를 촉촉하게 적시고, 동그란 모양의 스쿱으로 젖은 흙을 눌러 동그란 무늬를 만들었다. 가져간 간식도 먹지 않고, 간간히 물만 마시며 모래 놀이터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건강에 좋다는 어씽이 유행하기도 전에, 우리 아이들은 먼저 맨발 걷기를 시작했다. 맨발로 모래를 밟고 뛰고 가지고 논다.

"그는 자연인이다" 둥근 꼬마 삽을 쥔 채 휴식중인 둘째


  한 번씩 지칠 때마다 웅덩이 안에 만들어놓은 모래 의자에 앉아 쉬고, 옷이야 버리든 말든, 머리카락 속에 모래가 박히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벌러덩 드러누워 하늘을 본다. 주먹 만한 돌멩이를 구해와 보석처럼 꾸미기도 하고 두꺼운 나뭇가지를 꽂아 영토를 표시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하도 놀이터에서 자연인처럼 놀아서 놀이터용 옷을 따로 준비해 뒀다. 학교 갈 땐 깔끔한 옷을, 놀이터나 시골에 갈 땐 뒹굴고 뛰어놀아도 아깝지 않을 편하고 얇은 긴 옷을 챙겨준다. 그렇게 땅을 파고 옷이 엉망이 되어도, 어차피 그럴 줄 알고 입힌 옷이라 마음이 불편하진 않다. 요즘엔 모래 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거의 없어서 우리 아이들은 전세 낸 듯 신나게 땅을 판다. 이렇게 놀아 본 적이 없다는 사촌 동생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우리 아이들은 놀이공원에 가자고 해도 거절한다. 오랫동안 줄을 서는 것도 싫고, 놀이기구를 타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것도 재미없단다. 차라리 놀이터에 가서 놀이를 만들어하거나, 땅 파는 게 훨씬 재밌다는 아이들. 덕분에 우리 가족은 휴일이 길어도 아이들의 승인이 없는 한 대부분 집 앞 놀이터로 향하고 만다. 때론 새로운 곳에 가서 멋진 사진도 남기고 드라이브도 하고 싶은데 아이들이 이게 더 좋다니 별 수가 없다. 결국 아이들을 위해 가려고 했던 곳들이니까 부모 마음에 좀 아쉬워도 우리가 포기하는 수밖에.


  우리의 휴일은 손님 접대와 집 앞 놀이터에서 땅 파기로 끝났다. 저녁에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돈가스와 우동을 먹는데 오늘 하루 어땠냐는 물음에 아이들이 엄지 척을 날린다.

  "완전 최고였어!"


  너희들이 좋다는 데 핑크 뮬리 축제와 커피 축제가, 불빛 레이저 쇼와 모노레일이 문제일까? 저 엄지 척 한 방에 또다시 오늘도 아이들에게 져 주는 부모가 되길 잘했다는 마음이 든다. 돌아오는 주말에는 무얼 하고 싶냐고 물어보니 또다시 같은 대답을 반복한다. "집 앞 놀이터에서 땅파기!"


이번 주엔 어린이를 위한 오케스트라 클래식 공연을 예약해 놨다고 하니 큰 인심 쓰듯 대답한다.

  "그럼 알겠어. 엄마가 어렵게 예약했다고 하니까 갈게. 가서 눈 감고 자면 되니까 괜찮아."


  오늘도 이마를 탁 치고, 입이 떡 벌어지게 하는 아이들. 그래도 그 순수한 마음에 웃음이 나고 가을꽃과 축제보다 더 풍성한 기쁨이 피어오른다.

놀이터 리모델링중인 아들과 조카. 파고 또 판다. 집에 갈땐 다시 원상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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