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이가 함께하는 집 공부
"엄마, 5분만 쉬어도 돼요?"
"너무 졸린데 오늘은 자고 내일 아침에 할게요."
"배고파서 저녁 먹고 좀 쉬었다가 공부할게요."
"친구랑 놀고 와서 이따가 공부할게요."
우리 집에 사는 만 9세 남아는 말띠답게 지치지 않고 뛰어노는 걸 좋아한다. 위의 말들만 들으면 내가 아이에게 너무 공부를 너무 많이 시키는 것 같이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공부는 아이가 정한 만큼, 정한 과목만 한다. 집중해서 하면 금방 끝내고 하루 종일 놀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놀기'가 먼저다.
아이가 많이 놀았으면 좋겠다. 내 바람이 무색하게 아이는 실제로도 많이 논다. 아이의 하루는 아이가 정한 스케줄에 의해 정신없이 돌아가지만 틈틈이, 아니 많이 논다. 초등학교 4학년 남자아이라면 대부분 게임에 빠져 있지만, 꿀동이는 거의 직접 몸을 움직여 노는 걸 좋아한다. 지난주엔 시골에 가서 하루종일 논고랑을 뛰어다녔다. 올챙이를 잡기 위해서다. 도시에 와서도 놀이터 가서 땅파기, 비비탄 줍기, 친구와 보드게임하기, 숨바꼭질, 동생과 윷놀이, 엄마와 '몸으로 말해요' 놀이, 축구, 수영, 만들기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남편이 '땀쟁이 넝쿨'이라 부를 정도로 뛰어노느라 늘 땀에 젖어있다.
하지만 문득 내 안에 뾰루지처럼 걱정이 돋아날 때가 있다. 쉴 새 없는 돌아다니는 학원차들, 친구들의 레벨 평가 소식, 아파트 분리수거날 버려진 친구들의 백 점짜리 시험지, 주변 누군가의 "꿀동이도 얼른 ㅇㅇ학원 보내고, xx 같은 것도 좀 시켜"하는 등의 이야기. 꿀동이에겐 꿀동이만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뾰루지가 곪아 터질 때면 불똥이 아이에게 튀고 만다.
"너 너무 놀기만 하는 거 아니니?"
꿀동이에겐 꿀동이만의 계획이 있다. 공부가 밀린 것 같다가도 어느새 보면 밀린 부분까지 다 해놓았다. 놀기만 하는 것 같아도 공부 스트레스를 받고 친구들에게 어떤 공부를 얼마큼 하는지, 어떤 문제집을 푸는지 물어본다. 학교에서 학습지를 풀 때마다 어떤 친구가 몇 분 만에 풀고, 어떤 친구가 백점을 맞는지 관심을 기울인다. 가끔 나에게 말도 안 되는 질문도 한다.
"엄마는 도라에몽 가방에서 나랑 똑같이 생긴 아들이 나와서 모든 게 나랑 완전 다 똑같은데, 공부를 하나도 안 밀리고 잘하는 아들이랑 나랑 있으면 누구를 선택할 거야?"
겨우 공부 하나 가지고 사랑을 시험하다니, 나는 웃음을 머금고 대답한다.
"당연히 꿀동이지. 아무리 똑같아도 엄마 뱃속에서 나온 꿀동이랑 완전히 같을 수는 없어. 엄마는 꿀동이의 꿀 냄새, 고운 목소리, 엄마 탯줄이랑 연결됐던 배꼽, 엄마를 보는 다정한 눈빛까지 한 번에 다 알아볼걸."
아무리 같은 답변을 해도 아이는 묻고 또 물으며 내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도라에몽 가방에서 나오면 그것까지도 완전 다 똑같아. 그냥 공부 잘하는 것만 다를 때 말이야."
아직 어린것 같은데도 벌써 이렇게 공부 스트레스를 받다니 어떨 때 보면 짠한 마음이 든다.
"꿀동아, 공부는 잘하면 좋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그냥 공부를 잘할 뿐이지 그게 너랑 비교대상이 될 수는 없어. 너는 태어난 것 자체로 정말 귀하고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야. 공부 못해도 괜찮아. 밀리면 어때. 그건 당연한 거야. 어린이는 원래 공부 안 하고 놀고 싶어 하고 놀아야 하는 거야. 너는 존재 자체로 아주 훌륭해."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하고 한번 더 확신을 받고는 행복한 미소를 머금는다. 나는 가끔 아이에게 하는 말을 통해 나 스스로 위로를 받기도 한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 들었던 말 중 힘이 되었던 말, 들었더라면 인생이 바뀌었을지도 모를 그런 말들을 아이에게 한다. 그리고 아이가 아직은 내 말이라면 어떤 말이라도 믿는 이 중요한 시기에 앞으로의 인생에 귀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인데도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고 하면 주변에서 많이 물어본다. 집에서 어떻게 공부를 하냐고, 엄마가 대단하다고 반은 의심하기도, 치켜세우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이가 공부하는데 왜 엄마가 대단하지? 학원 또한 아이의 선택이지 가고 안 가고 가 중요한 게 아니다. 꿀동이는 개방된 곳에서 여럿이 모여 공부하는 것보다 혼자 방에서 문 닫고 조용히 공부할 때 집중을 잘한다. 오랜 시간 생각하고 천천히 답할 시간이 필요한 아이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 중학교와 연계된 수학이 시작되면서 많이 어려워진다고, 초등 수학의 '꽃'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과연 언제까지 집 공부를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된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입학했을 땐 초3부터 많이 어려워진다는 말을 들었고, 초3이 되었을 땐 4학년이 되면 힘들어진다고 들었으니 수학은 그냥 계속 어려운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학은 그냥 어렵다. 숫자와 도형, 분수와 그래프가 어지럽게 얽히고설켜 수많은 변수를 생성하고 문제를 뒤꼬며 어렵게 만든다. 수학 머리가 없는 나는 진즉 아이에게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꿀동아, 엄마는 수학이 너무 어려워. 너에게 알려주고 싶지만 엄마는 힌트도 주지 못하고 설명도 해주지 못해. 엄마가 채점은 해주지만 문제를 풀고 해결하는 건 네 몫이야. 언제든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학원에 가고, 네가 몇 시간, 며칠이 걸리든 혼자서 풀고 붙잡고 늘어져서 해보고 싶다면 집에서 해봐."
아직까지 아이는 집 공부를 택한다. 그래서 아이의 수학 공부 스케줄은 '양'이 아니라 '시간'으로 정했다. 전에는 하루에 문제집 몇 장 풀기, 이런 식이었다면 이제는 몇 시까지 수학 공부를 하는 걸로 정한 것이다. 양으로 정했더니 밤에 너무 늦게 자게 돼서 이렇게 변경했다. 한 문제를 풀든, 두 문제를 풀든 관계없이 아이는 성취감을 맛본다. 어쩔 땐 너무 어려워서 일주일 넘게 걸릴 때도 있고 머리를 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요즘 문제집엔 많이 어려운 부분은 동영상 해설 강의가 큐알코드로 달려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아이는 그 마저도 거부하고 혼자 해내고 싶어 한다.
진도는 더딜 수 있지만 아이는 수학에서 희열을 맛본다. 우리에게 선행은 없다. 그저 할 수 있는 만큼 다지고 또 다져서 혼자 단단하게 밟고 지나갈 수 있을 때까지 부딪혀본다. 때로 문제 풀이 과정이 답안지와 다를 때면 아이와 상의해보기도 한다. 아이가 풀이 과정을 쓰지 않고 머릿속으로 풀기 때문에 나중에 아이의 말로 풀이 과정을 듣는데, 그게 답안지와 다르면 아이와 함께 이야기해 보고 아이가 접근한 방향이 새로운 방식인지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 상의한다. 나도, 아이도 수학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마저도 맞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문제집도 아이가 택한다. 이번에 아이가 택한 문제집은 최고난도의 서술형 문제집이다. 몇 번이나 이걸 정말 할 수 있을지 되물었지만 아이는 재밌어 보인다는 단답으로 확신을 했다. 그리고 많이 틀린다. 아이는 틀릴 때마다 괴로워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이 문제집은 맞는 게 신기한 거야. 그러니까 틀리는 게 당연한 거지."
그랬더니 이제는 문제를 틀려서 눈물을 흘리는 횟수가 줄어들고 먼저 이렇게 말한다.
"오, 이 문제는 어떻게 맞았지? 이 쪽은 많이 틀렸지만 맞을 때까지 혼자서 풀고 또 풀어볼게."
신기한 건 어려운 문제도 결국 혼자서 해낸 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이해가 안 가고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도 아이는 해낸다. 문제를 풀고 나면 처음에 왜 틀렸는지 되짚어 보는데 대부분 간단한 연산이나 문제를 제대로 읽지 않아서 일 때가 많다. 그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요즘 문제를 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우리만의 방식으로 공부를 하다가도 문득 두려움에 휩싸인다. 정말 이렇게 공부하는 게 맞나? 공부의 양과 방향, 흐름과 방식이 모두 제대로 되고 있는 건가? 하루는 아이가 학교에 다녀오더니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우리 반에 정우는 고3 수학까지 다 끝냈대. 친구들하고 정우한테 제일 쉬운 문제를 내달라고 했더니 중학교 수학 문제를 내줘서 아무도 못 풀었어."
초등학교 4학년에 벌써 고등학교 수학까지 마치다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혹시 그 아이는 영재가 아닐까? 아니면 다른 아이들도 비슷하게 진도를 나가고 있는 걸까? 이런 고민에 빠졌을 때, 우리 아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면 예비 중학생 과정인데 진도가 너무 느려요. 빨리 따라잡아야 해요."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중학생이 미적분 문제를 풀고, 초등학생 아이들이 영재교육원에 다니느라 부모들이 뒷바라지로 더 바쁘다. 방학이면 각종 캠프와 특강으로 주말까지 반납하고 학력 신장을 꾀한다. 학년마다 다니는 학원, 2년마다 바뀌는 학원 트렌드, 레벨 테스트 결과와 각종 경시대회 준비로 다들 너무 바쁘게 사는 것 같다. 그럴 때면 나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쉴 새 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우리만 너무 느린 것 같다. 유치원에 다니는 둘째 꼬맹이의 친구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각종 학습지와 학원으로 놀이터에 아이들이 없다. 심지어 얼마 전에 우리 아파트 대표에 지원한 사람의 공약이 '놀이터를 없애고 다른 시설 확충'이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유치원부터 초, 중, 고등학교까지 있어 대부분이 아이를 키우는 집인데도 말이다.
불안감이 들 때면 이게 정말 아이의 문제인지, 나의 문제인지 분석하려 애쓴다. 눈을 멀게 하는 불안감을 최대한 멀리 떼어내어 객관적으로 보려 한다. 아이에게 개선이 필요한 부분인지,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감정으로 인한 왜곡된 과정인지 점검하는 것이다. 혹시 나의 결핍을 아이에게 채우려 하는 것은 아닌지, 꿀동이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부분인지, 아이의 길고 긴 인생에서 이것이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일지 숙고한다.
아이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아이와 이걸 해야 하는 이유와 필요성, 해결 방법에 대해 충분히 논의한다. 이후 아이가 직접 학습방향을 조정하고 스케줄을 변경한다. 나는 아이가 직접 자신의 일정을 세우고 관리하고 수정하도록 돕기만 한다. 아이는 주 5일 공부를 7일로 늘리기도 하고, 시간을 변경하기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계획을 지키려 알람을 맞춰가며 노력한다.
그러나 대부분 걱정의 원인이 나의 욕심이나 불안일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아이에게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스스로를 다잡는다. 나의 미숙함으로 존귀한 아이의 존재를 흠집 내지 않기를, 겨우 내가 경험하고 들은 게 다이면서 그게 세상의 진리인양 어리석게 굴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좁은 시각에 아이를 가두는 것은, 몇백 킬로미터를 날아갈 수 있는 용맹한 야생의 새를 새장에 붙잡아 두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호딩 카터 주니어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 두 가지 있다. 한 가지는 아이의 근본이 되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날개가 되어주지 못할 망정 날개를 꺾진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대신 아이들이 없을 때, 남편과 상의하고 위로와 응원을 받는다.
꿀동이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미래에 어떤 직접이 생기고 없어질지 모르는데, 의미가 없단 결론에 이르고 만다. 게다가 직업이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존재 자체를 설명하긴 힘들다. 직업이야 있다가도 없고, 이런 일 저런 일 할 수도 있는 거니까. 게다가 조금 과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인생의 끝이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데 너무 먼 미래를 그리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의 어느 시점까지 내가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반우스갯소리지만 얼마 전 남편과 건강검진을 앞두고 유서를 써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다만 꿀동이가 요즘 어떤 생각을 하는지, 학교에선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친구와 무엇을 하고 노는지, 급식은 맛있게 얼마나 먹고 있는지, 과거에 들었던 안 좋은 말이나 경험은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요즘 어떤 책을 재밌게 읽고 있는지,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편안한지 등을 묻는다. 아이는 웃기고 슬프고 화가 나고 속상한 일들을 쏟아낸다. 우리의 공부 방법이 틀린 건지,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우린 서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이라는 것이다.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다 잠이 들고, 서로를 웃기는 행동들을 하면서 집에 있을 땐 그저 평안하다.
알 수 없는 평안이 우리를 감싸고돈다. 남편도, 아이들도, 나도 집에서라도 평안해야지, 집에서라도 시간이 느리게 가야지, 우리라도 서로의 굳건한 편이 되어 줘야지, 다짐한다. 각자 삶의 최전선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고 느리더라도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