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돋을볕 Dec 09. 2022

놀이터에서 사라진 아이들

아이도 그렇고 누구든지, 상대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사랑해야 한다.

 드디어 첫눈이 내렸다. 아침부터 눈이 날리자 아이들은 벌써 설레는지 재잘재잘 아침상에서부터 고운 목소리를 낸다. 싸라기눈으로 그칠까 싶더니 자국눈이 되고, 첫째가 학교가 간 뒤에는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둘째를 유모차에 태워 어린이집에 가는데 바퀴가 눈에 빠져 쉬이 굴러가질 않는다. 둘째는 유모차 방한 커버에 뽀얀 김을 내며 눈동자를 굴리고, 나는 롱 패딩에 우비를 걸친 채 바둥대며 나아간다. 유모차 바구니에 어린이집 가방을 넣고 젖지 말라고 수건 하나를 덮어 두었는데 어디선가 사라지고 노란 가방이 몸뚱이를 내밀고 있다. 어린이집에 도착하자 아이는 뽀송한 병아리 같은데 나는 한라산을 등반하고 온 것처럼 초췌하다.

  오전 내내 눈이 날렸다. 흙바닥이 보이던 테니스장은 하얀 수영장으로 변하고 단풍 진 나무는 눈꽃을 왕관처럼 쓰고 있다. 눈이 오는 날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싶을까? 오늘 해야 할 일과 공부는 내일로 다 미루고 신난 강아지처럼 뛰어놀고 싶을 것이다. 어렸을 때 아빠가 썰매를 만들어 끌어주셨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해줄 차례다. 베란다에 넣어둔 썰매를 꺼내고 스키 바지와 장갑, 눈 오리와 모래놀이 도구를 챙겼다. 방한 부츠와 따뜻한 물, 여벌 양말까지 챙기니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짐이 많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다니다 보면 더하면 더했지 짐을 적게 가지고 다니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내 것은 하나도 없는데 이미 짐으로 포화되었다.


  아이들의 하교 ·하원 시간에 맞춰 뒤뚱거리며 짐을 들고나갔다. 한 명씩 데리고 와 곧장 작년에 썰매를 탔던 가풀막진 산책로로 향했다. 거리는 이미 언제 눈이 왔냐는 듯 까만 아스팔트로 뒤덮여 있었다. 많은 아이들이 썰매를 타는 비탈진 산책로도 염화칼슘으로 눈이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여기저기 썰매 탈 곳을 찾아다니느라 아이들은 입이 댓 발 나왔다. 마침내 발견한 곳은 공원 놀이터 한편에 있는 낮은 둔덕이다. 아직 염화칼슘이 닿지 않은 응달에서 짐을 풀었다. 첫째는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고, 둘째는 야트막한 언덕에서 썰매를 타기 시작했다. 찬바람을 가르며 소리 지르고 눈 위에서 뒹굴고 삽으로 눈을 파내고 오리 집게로 눈 오리를 만들었다. 짧은 다리로 쫑쫑거리며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 옆에서 사진도 찍었다. 마스크 속으로 땀인지 콧물인지 액체가 송골송골 맺고 해껏 놀았는데도 아이들은 집에 갈 생각이 없다.

  그때 멀리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사람이 눈길에 고꾸라졌다. 걱정되어 달려가 보니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청소년이다. 헬멧은 날아가고 하얀 봉지 속으로 떡볶이 포장이 보인다. 아이는 많이 다쳤는지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킨 아이는 자전거를 타지 못하고 절뚝인다. 119를 불러야 할지, 가족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집이 바로 앞이라고 그냥 가겠다고 한다. 짐을 챙겨 자전거에 걸어주고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꼭 병원에 가보라고 당부하는데, 집엔 아무도 없고 바로 학원에 가야 한다며 등을 보인다. 내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 망설이다 한마디를 던졌다. “그래도 병원은 꼭 가봐요. 혹시라도 뼈라도 다쳤으면 큰일이에요.” 아이들이 있는 놀이터로 돌아가는데 씁쓸한 마음이 인다. 그제야 맞은편 대형 학원가에 수많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가고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놀이터에 아이들이 없다. 심지어 눈까지 쌓여 놀거리가 한가득인데 아이들이 오지 않는다. 고급 브랜드의 옷을 입고, 어른 같은 가방을 메고 학원에 간다. 나는 옷을 살 때 아이들이 스스로 입고 벗을 수 있으며 편하게 활동할 수 있는 것으로 고른다. 바지는 다리가 잘 벌려지고 윗도리는 되도록 단추가 없는 것으로 구입한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에 나오는 부잣집 도련님 같은 모습은 구현하기 어렵지만 놀이터에서 뛰놀고 뒹굴어도 다칠 염려도 적고 마음도 편하다. 피팅 모델처럼 예쁜 옷은 나중에 입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옷도 자기 나이에 맞게 입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놀이터에서 눈놀이에 열중한 아이들의 옷이 흙과 눈으로 범벅이다. 저 두꺼운 외투와 운동화를 빨 생각을 하니 눈앞이 하얗지만 저 맑은 웃음과 귀여움이 무기인 아이들이다.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첫째가 말한다. “엄마, 나는 엄마가 내 엄마여서 너무 좋아. 다른 친구들은 가기 싫은데 엄마가 억지로 학원 보낸다는데 엄마는 보내지 않아 줘서 고마워. 내가 하고 싶은 거 잔뜩 하게 해 줘서 고마워.”

  아이의 말을 들으며 두 가지 마음이 들었다. 하나는 바람대로 오늘이 행복한 아이로 잘 자라고 있구나, 계절을 즐기는 놀이를 하고 충만하고 풍성한 가슴으로 자라는 구나, 하는 희열이다. 또 한편으론 어쩔 수 없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생긴다. 나 또한 학습 위주의 경쟁 시대를 살아왔다. 친구들을 경쟁자로 여기고, 공부를 잘해야 뭐라도 될 수 있고, 공부로 서열을 매기며 자라왔다. 이것밖에 모르는데 이 길이 아닌 다른 길엔 뭐가 있을까? 알 수 없다. 왜 억지로라도 미리 가르치지 않았냐고 원망하면 어쩌나 두려움이 생길 때도 있다. 하지만 자식은 내가 아니다. 내 소유도, 내 분신도, 내 욕심을 대신 채울 대상이나 나 대신 자랑할 장신구도 아니다. 아이도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고민하고 절망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제3의 인격체다. 학원을 보내더라도 아이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해서 함께 결정하고 싶다.


  첫째가 할아버지를 무척 좋아하고 따라서, 고향 집에만 가면 첫째 얼굴을 보기 어려울 정도다. 늘 할아버지 손을 잡고 쫓아다닌다. 아빠에게 그 비결을 물어보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도 그렇고 누구든지, 상대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사랑해 줘야 하는 거야.”


  엄마로서의 임무는, 나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이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는 일이다. 내가 바라고 두려워하는 미래에 파묻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갈 아이들의 버팀목이 되는 것이다. 아이가 내 생각보다 공부를 잘하지 못해도, 건강하지 않아도, 착하거나 지혜롭지 않아도, 자신감 넘치고 운동을 잘하지 못해도 그저 그 존재만으로 충분하다.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


  시몬 베유는 『중력과 은총』에서 사랑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행복한 사람에게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해졌을 때 그 고통을 함께 나누려 하는 것이다. 불행한 사람에게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그 기쁨을 나누지 못해도 혹은 나누기를 바라지 않으면서도 만족하는 것이다.” 오늘이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자녀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무리하지 않고 매일을 살아갈 일상 근력을 키우고 싶다. 아이뿐만 아니라 나 또한 자녀를 양육하며 단단해지고 진정한 어른으로 자라가 길 원한다.



20221209

이전 08화 우리 아이의 진정한 자기주도학습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