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돋을볕 Jan 16. 2023

아이의 겨울 방학

내가 힘써야 할 것은 아이의 인생 설계가 아니라 내 안의 욕심과 기대다

팝콘처럼 쏟아지는 대살진 눈발, 수묵화처럼 차분하게 휘감긴 하얀 마을. 아이들은 부츠에 썰매를 끌고 나서고 설익은 입김이 솜사탕처럼 피어오른다. 일본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소설 <설국>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시마무라'의 온천마을 방문기인데 스토리보다는 거진 반 페이지에 가까운 수식과 서술어에 눈길이 가는 작품이다. 눈이 오는 날을 어떻게 기록하면 좋을까 고민할 때마다 이 책의 첫 문장이 떠오른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혹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생각한다. "무진에 명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보는 일일 뿐"이라고도 말했다. 나의 글쓰기도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매일 아이들의 필요에 귀 기울이고 잊기 쉬운 흔한 일과에 그때 당시의 시선을 담아 비춰본다.

눈 오는 시골집 마당


  아이를 키운다는 건,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이 아이가 과연 어떤 인간인지에 대한 탐구이다. 우주 같은 존재로 부모를 대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가진 힘과 위치를 강압적으로 휘두르지 않고 내 욕심 혹은 기대와 싸우는 일이다. 12월의 마지막 날, 아이의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생활통지표와 그간 학습한 내용들을 가지고 왔다.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려는 의지가 강하고, 관심 있는 것은 온 마음과 힘을 쏟아 집중"한다는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엄마의 눈으로 재해석하자면 스스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거나 관심이 없는 분야는 절대 거부한다는 뜻이다. 일례로 피아노 학원에 보내려고 했더니 자신은 가지 않겠다며 그 이유를 소신껏 다섯 가지나 생각해 왔다. 주변에서 아이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고 여러 경험을 하게 해줘야 한다, 어떻게 아이가 좋아하는 일만 시키겠냐고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지만 그렇게까지 억지로 아이를 끌고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악기 하나쯤 다루는 게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해 주겠지만 그게 꼭 피아노일 필요도 없고, 학원을 보내는 것만이 '풍부한 경험'은 아닐 테니 말이다. 아무리 어려도 자아가 있는 인격체이고 호불호가 있으며 이를 무시하고 억지로 끌고 가다간 한순간은 잘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언젠간 부모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하는 순간이 오면 그때가 가장 적절한 때이다. 그럴 때 도와주라고 내가 이 아이의 보호자로 당첨된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게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일진대,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재단할 수 있을까? 내가 부러워하고 좋아한다고 해서 아이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실패하고 고생하더라도 언제나 너의 편이 있다는 사실만 안다면 좀 더 따뜻한 삶이 되지 않을까?

아파트 공터에 누가 이렇게 정성스럽게 선전포고를 해놓았다. 거대하게 느껴지는 해방감!


  아이와 방학 계획표를 짜면서 많이 부딪혔다. 내 생각에 부족한 부분은 메꾸고 앞으로 필요한 사안들은 추가하다 보니 공부량이 많아졌다. 반면 아이가 생각한 하루 일과는 헛웃음이 나왔다. 아침에 병아리랑 놀고 싶어요, 점심에 달팽이를 잡고 싶어요, 저녁에 염소 밥을 주고 싶어요. 친구들은 방학 특강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말도 반납해 진도를 빼는 데 내 아이는 이렇게 놀아도 되는 걸까? 동생과 소파에 앉아 '꼬마버스 타요'를 보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눈앞이 노래졌다. 방학 때 아이가 원하는 대로 시골에 내려가 병아리랑 놀고 달팽이를 잡을 것이냐, 학습으로 갈고닦아 다음 학년을 준비할 것이냐 심히 번민했다. 결국 아이가 원하는 대로 시골로 내려갔다. 아침 식사를 마치면 산으로 달려가 동물들 먹이를 실컷 주며 뛰어놀았다. 해가 지도록 뛰놀고 뒹굴며 흙투성이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와 밥을 두 공기나 싹싹 비웠다. 엄마는 어렸을 때 이런 데서 자라서 좋았겠다며 외할아버지 손을 붙잡고 트랙터를 타고 마을을 누볐다. 하루하루가 천국에 온 것처럼 신나고 행복하다며 기뻐했다. 입이 귀에 걸린 아이를 보면 참 잘했다 싶으면서도 자꾸 내 안의 어린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등록금이 모자라서 원하는 학교에 못 가고 국립대에 가야 했는데, 학원비가 없어서 배우고 싶은 것을 실컷 배우지 못했는데 그 아쉬움과 결핍을 아이는 겪지 않도록 채워주고 싶다는 욕망이 자리한다. 그러나 이 아이는 내가 아니다. 내 뱃속에서 나왔지만 나와 다른 사람, 전혀 새로운 DNA로 자기 인생을 살아갈 제삼자이다. 내가 힘써야 할 것은 이 아이의 인생 설계가 아니라 내 안의 욕심과 기대이다.


  내가 내 안의 조급함과 불안함과 싸울 때에도 아이는 자라 간다. 자기의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탐험하고 도전하고 개척한다. 아이는 하루 종일 놀고 싶어서 스스로 새벽에 알람을 맞춰 일어났다. 나와 함께 계획한 계획표대로 다 해놓고 밥 한 그릇을 뚝딱 먹고 시골 풍경 속 강아지처럼 뛰쳐나갔다. 내가 학습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아이가 공감하고 동의한 부분에 대해서만 공부했다. 그날 할 분량은 아이가 스스로 정했고, 해보고 잘 안되거나 조절이 필요한 부분은 그때그때 수정하고 있다. 아이는 어떠한 칭찬이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공부할 시간과 진도를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하며 자신의 진도표를 만들어가고 있다. 성공한 날엔 눈웃음이 떠나질 않고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 날엔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내가 나와 싸울수록 아이와의 관계는 더 좋아지고,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것 같은 나에게 '최고의 엄마'라며 "이 세상에 엄마같이 좋은 사람은 없을 거야"하고 과찬의 말들을 입버릇처럼 늘어놓는다. 어쩌면 아이가 나를 조련해 가며 부모로 키워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픽사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은 자신의 인생 목적을 찾는 이야기이다. '존 가드너'는 재즈가 좋아서 중학교 정규직 음악 교사의 자리도 뿌리치고 엄마의 기대도 저버린 채 공연 오디션을 보고 합격하지만, 바로 그날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탄생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에 도착하고 육체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곳에서 지구별에 가길 거부하는 영혼 '22'를 만난다. 둘은 '삶의 목적'이라는 공통 과제를 갖고 동행하다가 마침내 인생의 목적이란 건 따로 없음을 깨닫는다. 하늘을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등 살아있음을 즐기며 사는 게 생명의 축복임을 알게 된다.


  내 아이도, 엄마이자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나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이루는 것은 그저 부수적인 게 아닐까. 자녀 교육과 양육에 조바심과 물음표가 들 때마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글만 쓰고 싶을 때마다 단순한 마음으로 돌아가려 노력한다. 오늘을, 지금을, 살아 있는 이 순간을 단단하게 누리는 것, 오지 않은 미래에 불안해하고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재를 둘러싼 행복을 여한 없이 누리며 살고 싶다.

하루 중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엄마. 얘랑 쟤랑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아?"
작가의 이전글 연말엔 도르리, 새해엔 글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