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돋을볕 Dec 03. 2021

염소를 모는 아이

어린 시절, 나는 염소를 모는 아이였다.

2021.12.03



   염소라니…… 나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염소에 대한 나의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나는 고향을 그리워하듯 때로 염소를 그리워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의 산과 들에는 염소가 많았다. 흑단같이 검은 그 짐승의 이미지는 바깥을 염탐하지 않는, 자기 내부에 틀어박힌 자의 침묵과 존재와 일체가 되어버린 슬픔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의미를 헛헛하게 뛰어넘는 가벼움…… 염소들은 염천의 불볕 속 메마른 개울가나 그늘 한 점 없는 들판 한가운데에, 숯덩이처럼 까맣게 묶여 있었다. 불볕이 몸을 뚫어 금세라도 화륵 타오를 것 같은 야릇한 평화를 거느리고…… 한밤 중에 어두운 들판에 묶여 노숙하는 염소는 그곳에서 솟은 산이나, 물길 트인 대로 흐르는 개울물이나, 그곳에 꽂혀서 자란 나무 한 그루처럼, 운명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어두운 하늘 아래 고요히 묶여 있을 줄 아는 염소는 세상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예감이 들곤 했었다. _전경린, 『염소를 모는 여자』



          

  “해 다 갔다. 빨래 걷어.”


  해 질 무렵이 되면 종종걸음으로 하루 설거지를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허리가 정정했던 할머니는 큰 소리를 우리를 불렀다. 그 소리와 함께 언니와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을 마주쳤다. 누가 마당에서 빨래 걷어 올래? 누가 가서 염소 데려올래? 나는 줄곧 후자를 선택하곤 했다. 아침이슬 맞으며 식사를 시작한 염소는 너무 길어서 안 한 거나 마찬가지로 보이는 긴 목줄을 한 채 사방의 풀을 다 뜯어먹었다. 염소는 식성이 너무 좋아서 달개비, 닭의장풀, 딱지꽃, 녹두, 고구마, 배추, 시금치, 호박, 주름잎, 쇠비름, 참비름, 질경이, 명아주, 엉겅퀴, 여뀌…… 못 먹는 생초가 없었다. 웬일로 안 먹었나 싶어 가만히 들여다보면 틀림없이 독성이 있는 풀이다. 오죽했으면 나폴레옹이 죽은 곳으로 유명한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염소 두 쌍이 수천 마리로 늘어나 생태계를 엉망으로 만든 일까지 벌어졌을까. 이 녀석들이 먹는 모습을 하루라도 옆에서 지켜본다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한 번 간 장소는 풀뿌리밖에 안 남아서 매일 장소를 옮겨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이 엄청난 식욕을 이용해서 산불이 나기 쉬운 곳의 풀과 나무를 제거해 산불 예방에 큰 도움을 얻는다고 하니 기특한 녀석들이다.


  “깜이, 해 다 갔어.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성별에 상관없이 까만 염소를 내 맘대로 ‘깜이’라고 불렀다. 깜이는 고집이 세다. 집에 가고 싶으면 말뚝을 뽑는 내 옆으로 얼른 다가왔다. 신나서 주위를 빙빙 돌다가 나를 줄로 꽁꽁 묶어 버리기 일쑤였다. 흥이 난 채 집에 가다가도 맛있는 생풀이 보이면 더 먹고 가겠다고 그 기다랗고 둥근 뿔로 버티고 서서 질겅질겅 씹어대기도 했다. 직사각형의 눈동자는 고개를 숙여도 늘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높은 언덕이나 큰 바위가 보이면 꼭 한 번씩 올랐다 내려가야 성미가 풀렸다.


  전경린의 소설 『염소를 모는 여자』의 주인공 ‘윤미소’는 답답한 현실에 갇혀버린 주부다. 놀랍게도 그녀의 탈출구는 염소를 모는 일이다. 처음부터 그녀가 아파트에서 염소를 기르려고 했던 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부탁에 반강제적으로 시작한 일이 그녀에게 묘한 해방감을 선사해주었다. 아파트에서 염소를 기르는 이 생소한 일이 ‘깜이’를 떠올리게 했다. 옆으로 쭉 뻗은 기다란 귀에 둥글게 말리며 뻗어가는 회색 뿔, 강아지처럼 툭 튀어나온 주둥이 끝으로 자그마한 콧구멍과 튼튼한 이빨, 가풀막진 곳도 거뜬하게 오르는 올찬 발굽과 뭉툭한 꼬리. 아빠가 “공주님”이라고 부르던 깜이는 아빠만 보면 마구 울어대며 만져 달라 성화였다. 어찌나 아는 체하며 애교를 떨던지 서운한 마음마저 들 때도 있었다. 아빠는 염소뿐만 아니라 모든 숨탄것들과 교감을 나누는 듯했다. 소, 염소, 닭, 개, 돼지…… 모두 아빠만 보면 좋아서 울어댔다.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안도했다. 아빠의 두텁고 거친 손은 약손이었다.


  염소에 대한 어린 시절의 추억은 녹용보다 더 진한 보약이다. 베란다 맞은편에 보이는 아파트들로 가득한 시선이 답답할 때마다 깜이를 떠올린다. 시간을 멈추고 싶을 때면 고향 집에 찾아간다. 벌레 먹은 보양식 쌀은 닭에게 뿌려주고, 산에 돋은 풀줄기를 보며 염소의 식사량을 가늠해본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_이육사, <청포도>      


고향 집 마당에서 자란 딸기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골에 고향이 있고 청포도가 익어 간다. 푸른 바다 같은 부모님이 계시고     같은 동물들이 살고 있다. 고달픈 몸으로 찾아가면  손에 은쟁반을 들고 나를 반겨준다. 염소를 모는 아이, 이제 자라서 포도 같은 향기를 품는다.     


아빠의 사랑을 듬뿍받는 “공주님”. 왕성한 식욕으로 황폐해진 녀석의 뜰
작가의 이전글 샤부샤부와 돈가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